가시나무는 가시도 함께 키운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가시가 있는 나무는 새 가지가 나올 때마다 가시도 함께 키워낸다.


나무를 상대하는 이에게 가시는 성가시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나무 자신에게 가시는 방어의 수단을 넘어 멋스러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시의 위용을 자랑하는 탱자나무도 그렇고 많은 선인장류의 가시야말로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마당이 없으니 집안에서는 가시 많은 선인장 류를 키우지 않는다. 내 조심성 없음이 자주 화분을 엎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선인장 화분을 엎었다가 잔 가시에 찔려 가시를 빼내느라 진땀 나게 고생한 기억 때문이다. 가시 있는 선인장이라곤 꽃기린 한 가지뿐이다.





그러면서도 가시나무가 나와는 괜찮은 궁합을 가졌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텃밭에 있는 엄나무와 가시오갈피도 그렇고 집안 베란다에서 자라는 깔라만시도 가시를 가진 나무들이다. 모두 특별한 관리 없이 잘 자란다. 텃밭에서 자라는 식물들이야 가시가 우거질수록 좋다. 짐승들의 공격을 그나마 덜 받을 수 있다고 생각돼서다. 하지만 수확할 때는 정말 조심해서 다뤄야 할 식물들이다.


남편은 가시오갈피나 엄나무 줄기를 수확할 때면 중무장을 한다. 손바닥에 붉은 고무를 입힌 목장갑을 양손에 끼고 왼손에는 오가피나 엄나무를 잡기 위한 니퍼 같은 도구를 들고 오른손에는 웬만한 나뭇가지는 단번에 자를 수 있는 전지가위를 든다. 그러고는 오가피나 엄나무 줄기를 잡고 가시를 긁어낸 다음에 적당한 길이로 잘라낸다. 경험상 단번에 잘리지 않는 두꺼운 줄기는 이제 처음부터 한쪽에 두고 삭을 때까지 모셔두기도 한다.


어마무시해 보이는 엄나무 가시도 세월 앞에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늦가을에 잘라 둔 엄나무도 가시오갈피도 한겨울 지나고 나서 가 보면 가시 먼저 떨어져 나가 있곤 하니 말이다. 가시도 공격이 있을 때에야 소용이 되는 수단이며 그 또한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져감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집안에서 자라는 깔라만시 두 분이 문제다.


식물의 성장도 사람 나이처럼 계단식으로 자람을 본다. 반들반들 야들야들 새순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듯 나온 후에는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꼼짝 않고 먼저 나온 잎들처럼 웬만한 손길에 쉽게 부러지지 않도록 짙푸르게 자란다.


씨앗 발아를 두 번씩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하던 중에 깔라만시 열매 하나를 선물 받았다. 싱싱한 열매 속에서 나온 씨앗들의 발아율은 100퍼센트였다. 그중 튼튼한 두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씨앗 발아로 꽃을 보기까지는 7~8년이 걸린다는 그 시기가 이미 지났으나 아직 꽃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구아버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꽃을 보여주리라 잊어버린 듯 기대를 하고 있기는 하다.


봄에 새순을 올리고 한동안 쉬던 깔라만시가 7월 말에서 8월 초에 걸쳐 새순을 마구잡이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월동 불가능한 식물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라도 옥상이나 마당에서 키울 수 있다면 수형도 잘 잡아줄 수 있을 터다. 꽃도 벌써 보았을지도 모른다. 삐죽삐죽 새순이 돋을 때마다 순집기를 해 주지 않으면 직진하듯 자라는 가지를 감당할 수 없어 해마다 야들야들 보들보들한 새순 끝을 잘라주곤 한다.


그때마다 깔라만시가 보내는 작은 저항의 소리를 쓰다듬지 않을 수 없다. 새순이 자라면서 자신의 방어수단인 가시도 함께 내 보내는 깔라만시의 가시를 잘라내면서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내보내야 한다. 새순이 나올 때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면 깔라만시 가시의 위력은 탱자나무 가시 못지않은 위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잎겨드랑이마다 품고 있는 가시를 어쩌다 놓칠 경우 깔라만시 가시에 찔린 내 손 어느 부위에서든 피를 볼 수밖에 도리가 없다. 피를 보고 나서야 가위로 가시를 잘라낸다. 놓쳐버린 아주 작은 가시는 시간이 지나면 가시 특유의 힘을 지닐 뿐만 아니라 가위로 잘라내기도 힘이 든다. 어떻게든 잘라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번 여름 땡볕에 자란 새순 끝 순집기를 하면서 샅샅이 뒤져 가시도 잘라냈음에도 아직 연한 새순 끝에 길이가 2cm도 넘게 자란 가시 하나가 남아 있었다. 엄지와 검지 손톱을 잎겨드랑이 끝까지 넣어 가시를 잘라냈다. 아무리 연한 가시일지라도 가시를 잘라내는 일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식물의 일부분을 잘라냄으로써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일 뿐이다.


"아프지, 미안."

내 말에 깔라만시가 대답했다.

"괜찮아. 네가 찔리면 나도 마음이 아파. 나도 피보는 거 좋아하지 않아."

순전히 내 관점에서 깔라만시의 마음을 읽고 있음을 깔라만시에게 고백한다.

"고맙다. 우리 함께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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