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병원에서 나와 약국에 들렀다.
몇 개월 전에 방문했고 오늘이 두 번째다. 두 번째인데도 코로나19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설치한 투명 플라스틱 가림판이 처방전 받는 부분에만 설치돼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동그랗게 뚫린 조그만 입구로 처방전을 들이밀었다. 나이 지긋한 예전의 그 여자가 내가 밀어 넣은 처방전을 받아 들며 다른 손을 옆쪽으로 쓱 내밀었다. 플라스틱 가림판이 부분적으로만 둘러져 있음을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여기도 뚫려 있어요."
"맞아요, 지나 번에도 그랬는데. 투명 가림판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해서 구분이 안 되나 봐요."
"어머나, 말씀도 이쁘게 하시네요. 감사해요. 사실 매일 여기서 지내는 저도 사방이 가림판으로 가려져 있는 줄 착각하곤 해요."
며칠 전에도 이 약국에 전화를 했었다.
"안녕하세요, 약국 옆 ** 병원 오늘 휴원인가요?"
"네, 오늘까지 병원 휴가예요. 내일 오시면 돼요."
그 내일은 우리가 시간 여유가 없어 흘려보내고 오늘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았다. 나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그녀와 그녀보다 또 몇 살 많아 보이는 약사는 부부일 거라는 생각이 처음 보았을 때부터 들었었다. 여자는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사는 그에 따라 약을 조제하고 조제 약봉지에 적힌 약의 종류와 복용법 등을 고객에게 꼼꼼하게 읽어가며 각인시키곤 했다.
그 몇 개월 전에도 약국에 전화를 했었다. 병원 주소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네비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병원 근처 골목을 돌고 또 돌아 엉뚱한 병원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약국에서는 친절하게 약국 주소를 알려주었다. 약국 주소를 입력하고 겨우 시간 맞춰 약국 바로 옆 병원에 도착하여 오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 다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엊그제 병원에서 전화를 안 받아 약국에 전화했던 사람이에요. 병원 휴가라고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날 하마터면 헛걸음할 뻔했어요."
내 말에 그녀가 더 반색을 한다.
"아유, 그거야 당연하죠. 우리 약국에 전화 거시면 옆 병원 웬만한 공지 사항은 다 아실 수 있어요."
마치 친한 사이처럼 그녀와 깔깔거리는데 약사가 봉투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네."
약사가 약 봉투를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네네, 약사님. 적어주신 대로 식사하자마자 복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약사께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시며 한 마디 하셨다.
"이 연세가 맞으신가요?"
"네?"
"아니, 연령에 비해 많이 젊어 보이셔서."
그러자 내가 약사의 아내라고 추정하고 있는 여자가 가세했다.
"그러게요, 저도 이 연령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와우, 이런, 마스크 덕분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지만 짐짓 잘난 척을 해댔다.
"어머 정말요? 이건 우리 남편 처방전이에요. 남편은 주차장에 차 빼러 갔구요. 그런데 약사님, 제가 남편보다 180일이나 먼저 세상 구경을 시작했는데요."
두 사람이 180일을 나이로 환산하는 모양이었다. 찰나 같은 생각을 뚝 잘라내며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입니까?"
"남편보다 180일씩이나 더 사셨는데 정말 동안이십니다."
하하하 호호호 껄껄껄 웃음이 잠시 이어졌다.
약사가 약봉지를 건네며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 한 턱 쏘셔야겠습니다."
"한 턱 쏠 날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몇 살은 더 젊어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남편이 차를 약국 앞에 대고 있었다.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남편보다 180일 먼저 태어났는데 남편보다 좁쌀알만큼 젊어 보인다는 게 그리도 좋은 일일까. 얼굴에 아직 남아 있을 웃음기를 들키지 않으려 남편에게 얼른 약봉지를 내밀었다.
"아침저녁 식후 바로 약 드시라고. 위장 상하지 않게."
천칭 양쪽에 새털과 나를 올려놓으면 분명 새털 쪽으로 푹 기울 것이다. 이 가벼움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 나는 오늘도 철없는 아내로 깃털보다 가볍게 살아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