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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Oct 28. 2021

불성실한 텃밭 농부의 수확물 갈무리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울금을 잘라 채반에 너는 것으로 성실하지 못한 텃밭 농부의 가을걷이를 마무리했다. 울금이 마르면 분쇄기에 갈아 챙기는 일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정도 일이야 일도 아니다. 오늘은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도 좋음이라니 건조기에 넣을 필요도 없겠다.


가을비가 자주 와서인지 예상외로 울금 수확이 많았다. 껍질 벗기는 일이 쉽지 않은 울금 껍질을 며칠에 걸쳐 벗겼다. 그러다 보니 먼저 껍질을 벗긴 울금은 꾸덕꾸덕 마르는 중인데 아직 껍질 벗기기 전인 울금은 껍질을 벗기면 싱싱한 물이 줄줄 흐른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황금빛 울금가루의 때깔의 질이 떨어질 듯하다. 한꺼번에 껍질을 벗겨 뜨거운 김 한 번 후딱 쏘인 후 잘라 말려야 하는데 일요일부터 오늘 목요일까지 껍질 벗기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 탓이다. 키워본 바로는 생강이나 토란, 울금 등은 비슷한 모양으로 껍질이 생성되나 보다. 껍질 벗기는 방법도 비슷한 데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양이 많다는 데 있다.


이웃에 나눔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울금의 양을 보며 남편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담금주는 담그는 것도 마시는 것도 모두 남편 몫이다. 퇴근한 남편이 저녁 식사 후 담금주를 사다 내가 갈무리해 놓은 꾸지뽕과 오가피 열매로 담금주를 담갔다. 꾸지뽕 두 병에 오가피 열매 한 병. 먹성도 예전 같지 않지만 효소 등 단맛이 나는 청을 즐기지 않는 것도 수확물들이 담금주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몇 해 전 담근 청들이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어제 아침 가끔 인사 나누는 사이인 같은 동 주민이 이번 가을엔 어떤 수확물이 있는지 물었다. 이것저것 엉터리 농부의 상황을 전하며 필요하면 조금 나눠드릴까 물었다. 꾸지뽕과 울금 등을 조금씩만 나눠달라고 한다. 다행이다. 남편이 더 많이 나눠 드리라고 나를 부추겼다. 후숙이 되면서 붉은색이 짙어진 꾸지뽕은 단맛도 조금 더 진해졌다. 그래도 내가 거둔 열매이니 오며 가며 집어먹을 생각으로 한 종지 정도 남기고 모두 나눔 봉지에 담았다. 아직 다듬기 전인 울금도 반 이상을 덜어내 이웃에게 건넬 봉지에 담았다.


특히 울금의 양이 푹 줄어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어깨며 손가락이 아파 울금 껍질을 더는 못 벗기겠다는 내 대신 자신이 할 일이 줄어든 데 대한 안도감이리라. 하지만 씨앗용 울금마저 사라졌던 어느 해를 생각하면 나는 남편처럼 좋아할 수만은 없다. 일의 양이 줄어 좋은 마음과 생각 외로 많은 양을 주심에 대한 부담감, 그러나 모두가 감사하는 마음이다.


저녁 운동 삼아 둘레길을 걷고 와 드라마를 보는 사이 남편이 울금을 다 다듬었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다. 오늘 아침 남편이 어제저녁 다듬었다는 울금을 보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옆구리에 자라다 만 작은 돌기들을 모두 싹 쳐냈을 뿐 껍질은 아예 벗길 생각도 하지 않은 듯한 상태다. 아침 식탁에서 남편에게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남편은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박박 문질러 잘 닦았는데 왜 이러십니까?"


남편 출근 후 오늘은 오전 운동도 쉬고 남편이 박박 문질러 씻었다는 울금 껍질을 먼저 벗겼다. 볕 좋고 공기도 맑은 날 빨리 말려야겠다. 나눔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동시에 나눔을 할 수 있어 일이 줄어들어 감사하다.






지금껏 카페에서 얻은 지식에 의하면 위 사진이 강황, 이레 사진이 울금이었다. 두 가지 모두 한 포기에서 수확한 것들이다. 블로그 이웃님의 글을 보며 카페에서 얻은 지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것은 강황이 아니라 울금이며 강황과 울금은 그 성질이 비슷하니 자신의 몸에 맞게 잘 사용하라는 내용이었다. 하긴 뿌리에서 나온 오른쪽 모양의 알맹이가 성장하면서 왼쪽의 모양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었었는데 이번 기회에 이웃님의 글을 통해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울금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강황과 울금의 다름을 알게 되면서 또 깨닫는 것이 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마음이든 말이든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거나 때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듯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길이 있으면 걸어보고 배울 수 있으면 배워도 보고 말을 할 수 있고 쓸 수 있으면 말하고 써보는 동안 모든 것은 비로소 제 역할을 충실히 해 낸다.





때 이르게 찾아든 시월 추위가 누그러졌다. 


가로수를 곱게 물들이는 햇살이 따사롭다. 갑작스러웠던 한파에도 굴하지 않고 저의 시절이 오니 단풍은 비로소 제 색을 내기 시작했다. 텃밭 근처든 어디든 단풍 구경 한 번 다녀와야 이 가을을 잘 보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엉터리 텃밭농이지만 가을걷이했노라 단풍처럼 마음도 알록달록 물드는 날도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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