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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Nov 03. 2021

새로운 파트너는 만들고 싶지 않지만


나는 혼자 걷기를 즐긴다. 혼자 걷는 길. 그 길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의 길이기도 하고 때로는 신께 올리는 나만의 기도의 길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심연의 시간이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는 아늑하고 아득한 길이다.


며칠 전 계단을 오를 때였다. 10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둘레길을 걸을 때 몇 번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눈인사를 나누고 나는 내 계단을 올랐다. 삶의 순간순간이 계단 오르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처음 목례를 나눈 다음 다시 엘리베이터 만났을 때 그녀가 물었다. 

"계단 운동 하시나 봐요."

차분한 표정에 단아한 목소리였다.

"네."

"저는 오전 오후 두 차례 둘레길 걸어요."

"네에. 저는 둘레길 걸을 때도 있고 계단 오르기를 할 때도 있어요."




갑자기 찾아들었던 시월 추위는 이 며칠 사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겨울이 코앞이니 누그러진 가을 날씨야 점점 한 겹 더 껴입으라고 알려줄 것이다. 더구나 겨울이 가까워오면서 북서풍을 타고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전 내내 먼 데 산은 물론 가까운 아파트 단지도 안갯속에 들어앉은 듯 뿌옇게 보였다. 중국의 공장 가동률이 높아졌다는 증거다.


오후 들어 바람이 불면서 하늘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앞뒤 창을 다 열어 바람이 드나들도록 해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일요일엔 텃밭에 가느라, 월요일인 어제는 텃밭 수확물 손질하느라 제대로 걷지 못했다. 일요일엔 텃밭에서 종일 지냈는데도 총걸음수가 1천5백 보였다. 어제는 겨우 1만 보를 채웠으나 남편과 함께 건성건성 걸은 걸음이 섞여 있을 것이어서 성에 차지 않았기에 땀 좀 흘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 계단을 올라오는데 앞에 10층의 그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계단참에서 내게 먼저 올라가라고 비켜서며 양보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곧 10층인데요."

10층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내가 사는 13층까지 걸어 올라와서 공원 한 바퀴 더 돌아볼 생각으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10층에 섰다. 10층의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녀가 물었다.

"댁에 계세요?"

"네?"

"직장 다니시지 않고 댁에 계시나 해서요."

"네, 2019년 이후로 직장 못 다닙니다. 춘추가 높다고 집에서 쉬랍니다."

말을 하고 나니 멋쩍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죠. 어르신 하고 싶지 않은데 어르신이라 부르며 편히 모시고 싶어 하는."

그녀도 나도 마스크 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중에 그녀가 물었다.

"댁에 계시면 저랑 같이 저 산 아래쪽까지 운동 같이 다니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내 생각을 쏜살처럼 날렸다.

"아뇨,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네?"

"함께 운동하려면 시간을 정해야 할 텐데 그 시간 맞추기가 서로 쉽지 않을 것 같다구요."

"네에."


그녀는 둘레길로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둘레길 전체가 아닌 일정 구간을 반복해서 걷는 듯했다. 반면 나는 둘레길과 계단, 공원과 미술관까지 마구잡이로 거의 일정한 시간을 정해둔 걸음수가 찰 때까지 걷는 편이다. 


공원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그녀는 차분한 성격에 적극적이고 따스한 성격인가 보다. 얼굴 몇 번 본 데 불과하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운동 파트너가 필요하던 차에 나를 만났나 보다. 나는 때로 차분한 성격에 소극적이고 차가운 성격이다. 젊어서는 친해지기 전에는 냉기가 돈다는 말을 듣기도 했었다. 사실 나는 대체로 덤벙대는 성격에 자주 적극적이고 미지근보다는 조금 따뜻할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물론 내가 나를 지극히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내 모습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제안을 조금 생각해 보고 답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가 함께 운동하자는 말을 쉽게 꺼냈을 수도 있지만 전혀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 아주 나쁜 점은 때때로 누군가의 좋은 의도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내 편의 생각만 가지고 단칼에 잘라낸다는 점이다. 




주머니에 단감을 하나 넣었다. 안사돈께서 보내오신 단감이 시중에서 사 먹는 단감보다 한 배 반은 커서 더욱 탐스럽고 맛나 보인다. 10층의 그녀를 만나면 내 체온으로 데워진 단감 하나 건네야겠다.


"좋은 제안을 거절해서 마음 상하지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실은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이웃과 여성센터에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친구가 시간을 정하고 함께 오가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죠. 그런데 그 친구가 처음 몇 번은 시간 잘 맞춰 나오더니 차츰 5분 늦어 10분 늦어 식이 되더군요. 결국 일찍 나와 기다린 저도 그 친구와 함께 지각을 하기도 했죠.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지각을 정말 싫어해요. 그날 이후 저는 그 친구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어요. 4년 정도 아주 친하게 지낸 친구인데 지각 건 이후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간 거죠. 아주 멀어진 건 아니지만 그 친구와의 시간 약속은 절대 하지 않게 됐어요."


10층의 그녀에게 이런 내 경험을 낱낱이 설명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축축한 나무처럼 불도 쉽게 붙지 않고 불이 붙어도 마르면서 타느라 꺼질 듯 타는 느려 터진 내 성격은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도 혼자 걷기를 즐긴다. 둘이 걸으며 줄곧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이 오히려 내게는 방해가 된다. 


그럼에도 내가 누군가의 제안을 상대의 마음 헤아려 볼 여유도 없이 싹 잘라냈다는 일은 마음이 쓰인다. 오가는 길 파트너는 오래전 이웃 하나로 충분하지만 새로운 이웃의 따스한 마음 정도는 헤아릴 수 있었어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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