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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Mar 14. 2022

선생님, 흰 머리카락이 마음 아파요

어제 이른 아침,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왼쪽 발목이 아파 걷기가 힘들었다. 혹시 남편이 걷어찬 건 아닌지 남편부터 의심했다. 전날, 만 보 걷기 외엔 별다른 일 없이 얌전하게 잠자리에 들었으니 함께 잠든 남편을 의심하는 건 내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호랑이연고를 떡칠하듯 바르고 절룩거리며 아침 준비를 했다. 발을 디딜 때는 괜찮은데 약간 구부릴 때마다 발목 안쪽 옴폭 들어간 주변으로 심각한 통증이 왔다. 남편은 바로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절룩거리며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가는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남편 출근 후 붙이는 파스를 붙인 다음 하루 정도는 참아보기로 했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발목에 이상이 생길 수는 없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가 머리 위를 지나갈 무렵이 되자 좀이 쑤셔 더는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낮 동안엔 보지도 않던 텔레비전을 켜도 보고 베란다로 나가 그날이 그날 같은 화초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서 그야말로 시간 죽이기를 했다. 





오늘 본 투표날 아침, 어제에 비해 통증이 한결 덜하다. 뭐지? 괜스레 한 번 아파본 건가 하다 번뜻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자다가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게 어디냐? 디딜 때마다 아픔에 신음 소리를 섞던 발목이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통증이 줄어든 게 어디냐?


누룽지를 끓여 먹고 남편과 함께 한의원으로 향했다. 두어 번 다른 한의원을 다녔던 적은 있지만 한의원 하면 늘 이 한의원이다. 전화를 걸어보니 투표날에도 5시까지 진료를 한다는 답변이다. 한의원은 목요일이 쉬는 요일이다. 엊그제 남편과 함께 사전 투표하길 정말 잘했다. 마치 발목이 아플 걸 예상이라도 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언짢은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상을 했다면 더 좋을 일이기도 하다. 아픈 발목으로 가뜩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투표장 모습을 긴 줄에 끼어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자.


본 투표일이라 그런지 한의원은 한산했다. 젊은 여직원만 바뀌었고 약재 정리를 하는 나이 든 여직원은 그대로다.  그녀가 말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자주 안 오시는 게 좋긴 하지만."

그녀에게서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치료 기구와 침 치료 안내를 하는 간호사 역시 예전 얼굴이다.

"건강하게 잘 지내셨죠? 2018년도에 다녀가시고 오늘 오셨으니."

"그렇지도 않아요. 안과도 다니고 병원이랑 친하게 지냈어요."

다른 환자들이 있긴 했지만 작은 소리로 오래 웃었다.






붓기가 없으니 더운 찜질에 이어 뼛 속까지 따뜻하게 한다는 극초음파 등을 쬐고 다시 적외선을 쬔 후 침 치료를 받게 되었다. 말끔한 얼굴의 원장님이 나타나셨다. 요즘 특별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으셨다. 만보 걷기 8개월째 진행 중이라고 말씀드렸다. 손으로 발목을 누르시더니 아프다는 자리에 사혈을 하고 침을 놓았다.

"다 나을 때까지는 걷기 운동 쉬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가만있을 걸 그랬다. 거기까지만 하고 입을 다물 걸 그랬다.

"선생님, 흰 머리카락이 마음 아프네요."

누워서 얼핏 스친 선생님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는 웃음기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특히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에게 더욱 친절한 저 인자한 미소에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약간의 살이 붙기는 붙었다. 하지만 나보다 한참 젊은 선생님의 귀 위쪽으로 하얀 귀마개를 걸쳐놓은 것 같은 저 흰 머리카락은 시간의 덧없음을 알려주는 외에 무엇일까 싶어 마음이 울컥했던 것이다.


후회나 깨달음은 실수를 저지르고 난 다음에야 따라오는 만년 지각생이다. '근데 흰 머리카락이 더 멋있어 보여요'라고 변명을 하려는데 침을 다 놓으셨나 보다.

"다 됐습니다."

총총 자리를 뜨셨다. 새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선생님'을 부를 용기까지는 없었다.





한 번 털보 선생님은 영원한 털보 선생님이다. 수염을 텁수룩하게 길렀던 마흔 초반부터 말쑥하게 수염을 밀고 난 이후에도 우리 가족들은 그를 늘 털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한 번은 한의원 가기 전에 전화로 물었던 적이 있다.

"간호사 언니, 오늘 털보 선생님 나오셨나요?"

"네, ㅎㅎㅎ 지금은 수염 다 깎으셔서 없어요."


나도 알고 있었다. 수염을 깎아서 매력이 반감됐다고 딸들과 입을 모아 험담을 하기도 했었다. 딸들이 각자의 길로 가고 난 후엔 한의원 들를 일도 그만큼 줄었다. 그럼에도 딸들은 엄마에게 들를 때면 때때로 그 한의원에 들러 털보 선생님에게 침을 맞고 가기도 한다.


침을 맞는 동안 30여 초 정도 왼쪽 다리 전체가 약간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 그랬던가 싶게 안정이 되기는 했다. 치료가 끝나고 일어서는데 아프기 전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의원을 향해 가던 때에 비하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계산을 하며 나이 든 여직원에게 한 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결 좋아졌어요."

그녀가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웃었다.

"한결 좋아지셨어요. 다행이에요."





젊은 친구가 계산서와 함께 약을 건넸다.

"육천 사백 원입니다. 약은 식후 한 포, 한 시간 후에 미지근한 물에 타서 드시면 돼요."


내가 잘못 들었다. 이천 사백 원이었다. 한약 하루치 세 봉과 침 치료는 물론 나를 돌봐 준 찜질과 극초음파와 자외선 쬐기 외 모든 서비스 비용이 총 이천 사백 원이라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내가 혹시 최상의 복지국가를 향해 가는 어떤 나라의 고령자이기 때문일까? 


털보 선생님께 드린 내 말 실수 값은 얼마지? 어떻게 물어 드려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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