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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pr 04. 2022

꽃이 진다 마음이 바쁘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노란 개나리꽃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리며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담장 위에서부터 늘어진 개나리가 노란 물을 퍼 올리기 시작한 사나흘 전만 해도 느긋했었다. 봄이란 꽃이 필 것 같다가도 꽃샘바람에 금세 주춤거리기도 하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도 하는 거라고 나름대로 여유를 부렸었다.


그러던 개나리가 한두 송이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온 담장을 노란 칠이라도 한 듯 덮어버렸다. 먼저 핀 꽃들이 봄바람에 툭툭 발 앞에 떨어져 내릴 때면 발걸음을 주춤하게도 했다. 노란 꽃이 지면서 방금 씻은 듯 고운 연두색 잎들이 뾰족뾰족 솟아나겠지. 그러자 문득 내가 눈 깜짝하는 사이 봄이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건 아닌가 조바심이 일었다. 작은 나무들도 풀들도 모두 봄을 맞아 제 할 일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나만 홀로 봄을 기다리며 먼 산 보듯 코앞에 와 있는 봄을 이제야 알아챘다는 듯 뒷북을 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꽃이 지기 전에 내게 늘 좋은 것을 보내주시는 안사돈께 없는 솜씨나마 동원하여 맛난 것 만들어 보내드려야겠다. 음식 만들기에 서툰 둘째와 사위를 위해 반찬 몇 가지 만들어 보내야겠다. 두 달 후면 만기가 돌아오는 첫째의 집 구하기도 바쁜 첫째를 대신해 내가 손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때다. 남편은 날이 풀리는 대로 장인 장모님 묘소에 다녀오자고 미리 언질을 주었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 다른 해 같았다면 메모를 해 가며 조금씩 준비를 해 두어 허둥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 봄은 대체 이게 뭐지? 한 끼만 걸러도 허기를 느끼는 건 언제나와 같은데 정작 철마다 하던 일을 아무런 준비 없이 날이 오고 가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듯하다.





약밥부터 마련했다. 밥이 약간 진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두 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째에게는 약밥 챙겨 주고 점심식사 후 집 알아보러 다닐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째는 오늘 약속이 있어 집 구하러 다닐 여력이 없다고 한다. 둘째는 늘 하던 말을 그대로 들려준다. 

"엄마, 이제 우리 걱정 그만하고 제발 힘들게 일하지 마시고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하세요."

그럼 됐다. 가까운 데 사는 첫째에게는 시간 날 때 들고 가면 될 테고 둘째에게는 둘째가 좋아하는 강된장과 반찬 몇 가지 만들어 주말 지나고 나면 약밥과 함께 택배로 보내면 되겠다. 


조금만 서두르면 오전에 여러 가지 일을 다 마칠 수 있겠다. 안사돈께는 둘째를 통해 약밥만 전달해 드리라 부탁하기로 하고 고추장멸치볶음과 강된장, 약밥에 김치 정도만 보내기로 했다. 멸치 먼저 살짝 볶아 따로 담아 두고 고추장양념장 끓여 볶아 두었던 멸치 넣어 고추장멸치볶음을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고추장멸치볶음을 해낸 냄비에 소고기 다녀 넣고 볶다 고추장과 된장을 분량대로 넣고 끓으면 각종 부재료를 넣어 다시 한 번 볶아낸다. 식으면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일 일찍 택배로 부치면 되겠다.


고추장멸치볶음 : 중멸치, 고추장, 나박 썬 마늘, 송송 파. 다진 양파, 참깨, 참기름

강된장 : 다진 소고기 한 컵, 된장 3큰술, 고추장 1큰술, 다진 마늘, 송송 파, 다싯물 1컵, 다진 양파, 

             생강술 1작은술, 매실효소 1큰술, 참깨, 참기름(고추장이 매워 청양고추 생략)



일찍 일어난 덕분에 아침식사 전에 할 일을 다 마쳤다. 남편을 깨웠다. 깨우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양 남편은 깨우려는 사람 마음 약해지게 코를 드르렁거린다. 하지만 오늘은 봐줄 수가 없다.

"빨리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이네."





묘소를 향해 출발하려고 나서니 9시다. 아침식사 후 꼼지락거린 결과다.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붉은색 옷을 입어야겠는데 내 옷 중에는 붉은색 옷이 거의 없다. 그중 밝은 분홍 폴라와 밝은 푸름이 섞인 회색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아직도 우중충하게 입고 다닌다 나무라실지 모를 아버지께 이 정도면 밝은 색이라고 우겨도 괜찮을 만하다. 


과일 등은 준비돼 있는데 포와 막걸리가 없다. 마트에 들렀다. 하필이면 내가 기다리고 선 줄에서 계산이 말썽이다. 한참 만에 정상 작동되어 계산을 하고 나와 달렸다.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한식을 앞둔 일요일이다. 차가 밀릴 수밖에 없다. 


10가 넘어서야 묘소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리들 다녀갔나 보다. 묘소 앞에 꽂아둔 꽃 색이 유난히 선명하다. 이 끝에서 저 끝이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누군가의 부모형제들이 누워 계시다. 날씨까지 이들을 대신하여 우리를 반기는 듯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을 택해 잘 왔다고 손이라도 맞잡아 주는 듯하다. 가족 나들이를 겸한 성묘객들의 모습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다른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한 여성 노인은 묘소 앞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누군가와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는 주황빛이 도는 노란 조화 카네이션을 묘소 앞에 꽂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께 술도 한 잔씩 올리고 절을 드렸다.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까지 땅속에 있거나 땅 밖에 있거나 왠지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삐죽 절이나 드리고 '엄마 나 왔어요' '잘 지내고 계세요' '엄마 나 가, 또 올게.' 하고 돌아섰을 테지만 오늘은 남편과 나도 은박 돗자리 위에 두 발을 펴고 앉았다.

 

"엄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아직도 코로나가 안 끝났어요. 우리가 엄마 아버지 곁으로 가고 나면 여기 누가 와 줄까요? 우리가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딸들이 자주 찾아오겠지만 앞 일은 아무도 모르니 말예요. 우리가 더 열심히 찾아뵙도록 할게요."

"마음은 자주 오고 있는데 몸이 자주 오게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사랑한다면서 연중행사로 그것도 길어야 십여 분 묘소 앞에 앉아 내 말만 몇 마디 들려드리고 돌아오는 게 전부다. 아까의 그 여성 노인은 여전히 누군가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날씨 탓일까? 죽은 사람들의 넋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안온함이 느껴졌다. 모든 이해관계나 경쟁관계에서 해방된 땅속과 땅 밖의 인간 사이라 그러할까? 서로 누구의 이야기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남편이 가다 서고 가다 서서 늑장 부리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서울 북쪽 끝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 추어 그런가 보다. 개나리는 아직 만개하지 않았고 목련도 며칠은 더 기다려야 피어날 듯하다.


눈 깜짝할 새 가 버릴 봄, 언제 꽃샘추위가 있었냐는 듯 며칠 후면 덥다는 말이 튀어나올 테고 한동안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 좋은 것은 늘 아쉽다. 벌써 꽃이 진다. 연둣빛 기운만 가물거리던 가로수들의 푸른 기운에서 힘이 느껴진다. 늦게라도 시동이 걸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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