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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pr 22. 2022

4월 중순인데 텃밭엘 가자구?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우리 밭에 갈 때 되지 않았나?"

지난 금요일 늦은 저녁 남편이 물었다. 나는 텔레비전에 눈길을 준 채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갈 때 된 게 아니라 벌써 많이 지났지."


시선은 텔레비전에 꽂은 채 나는 내 안의 내게 말을 건넨다. 텃발 잘 가꾸는 이들은 감자며 완두콩은 늦어도 3월 말에는 심었다지. 사월도 중순인 지금은 따사로은 햇살 받아 감자도 완두콩도 벌써 싹이 났다고 즐거운 비명이잖니. 한창 텃밭에 열을 쏟던 무렵엔 나도 그랬었잖아. 그러나 올 3월은 이미 지나갔으니 3월이는 불러도 소용없는 이름이다, 오호 통재라.


벌써 4월 중순이다. 5월 초순쯤 텃밭에 들러 뒤늦은 파종을 하고 잘 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나는 안다. 파종 후에도 자주 가보는 것도 아니리 테고 두어 달 지난 7월쯤에나 한 번 삐죽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온통 풀에 덮여 살짝만 건드려도 부러질 정도로 연하게 자라는 푸성귀들은 이제 심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김장 채소 심지 않은 지도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른다. 남편이 예초기로 풀 한 번 쳐 준 후에는 다시 몇 개월을 마음속으로만 매일 텃밭에 다녀온다. 그러다 10월 말쯤이나 되면 나 먹을 걸 겨울이 다 거둬갈까 걱정되어 한 번 더 삐죽 들여다볼 것이다. 





"이번 일요일에 텃밭에 다녀올까?"

내 안의 나와 마주 앉아 있는 와중에 끼어든 남편의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언제 저 남자가 내 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을 갖게 되었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반가우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거들었다.

"이번 주말? 지금 4월이야. 우린 5월 초에나 텃밭 가는 거 아니었나? 더구나 이번 일요일은 부활절인데."

"당신 성당 안 나간 지 한참 됐잖아."

"코로나 때문이지. 듣고 보니 기분이 거기시허네. 텃밭 안 가는 게 나 때문이라는 것 같아서."

"그런 뜻이 아니지. 아직 코로나 기간이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번까지는 용서하실 거라는 말씀이야. 당신도 아직은 코로나 무서워서 사람 많이 모이는 자리엔 못 갈 거 아냐?"


우리 가족은 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큰딸과 작은 딸, 그리고 남편까지 차례로 세례를 받았다. 남편이 세례를 받기까지는 남편의 교리 교육 6개월 동안 나 역시 한 번도 빠짐없이 남편과 함께 교리 교육을 듣기도 했다. 교리 교육은 몇 년에 한 번씩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매주 올리는 미사와는 또 다른 신선함을 교리 교육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교리 교육 진행자가 내가 존경하는 신부님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긴 하다. 남편은 세례를 받은 후 성당에 나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종교적 갈등은 일으키지 않으니 다해이다. 눈비 오는 날엔 성당 앞까지 나를 모셔다 주고 또 모시러 온다. 남편은 성전에 들어서면 느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건함이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남편의 그 느낌 이해할 수 있다.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 한때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그렇다고 성전이 자유분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젠가 목마른 말이 스스로 알아서 물을 마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안다. 일단 물가까지 함께 와 준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식의 믿음의 길을 가도록 하셨다고 믿기로 하면서 미사 참여를 강요하지 않게 되었다.


남편의 말이 맞다. 남편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특히 겁 많은 나에 대해서는 뼛속까지 들여다보듯 말이다.

"못 가겠지. 명절에 딸들도 오지 말랬는데 사람 많은 델 어떻게 가겠어요."

"그러니까 텃밭에 다녀오자구요,"

나이든 남편의 아양 떨기에 마음이 동해 하느님께 먼저 용서를 구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하소서. 새 성전 마련 후 미사 몇 번 참석도 못 했는데 여전히 코로나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남편이 드디어 이번 일요일을 택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사실은 23일엔 이웃 가평 텃밭에 가기로 약속이 돼 있어요. 그다음 주엔 동창 모임이 있고 동창 자녀들 결혼이 줄줄이 이어지네. 우리 텃밭은 나 몰라라 하고 남의 텃밭엔 열심이라는 당신 말이 걸려서 다른 말이 통 들리질 않아."




그러면 그렇지. 웬일로 남편이 4월 중순에 텃밭에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내나 싶었다. 남편 등짝을 쫙 갈라지는 소리가 나도록 한 대 쳤다. 남편은 한 번 더 때려달라고 등을 들이밀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대 때린 것만으로도 내 손만 아프다. 다른 일을 미리 만들어 놓고 지금 나를 살살 얼려보는 남편에게 못이기는 척 넘어가 줄 수밖에 뾰족한 수도 없다.


텃밭엔 사시사철 일이 널려 있다. 널려 있는 대부분의 일은 남편 몫이다. 울타리를 고치기나 울타리를 타고 올라 울타리 기능을 아예 마비시킬 정도로 무성하게 우거진 풀 치기,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퇴비를 흩뿌리고 땅을 파고 고르는 일, 몇 그루 되지는 않지만 유실수 등의 전지며 유실수 주변을 둘레둘레 파고 거름 주는 일까지 모두 남편의 손을 필요로 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남편이 골라 놓은 땅에 겨우 씨앗을 묻는 정도로도 팔다리 허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해댄다. 그마저도 한 해 다르고 두 해 다를 정도로 점점 힘이 들어 집에 돌아와서는 끙끙거린다. 텃밭 나들이는 좋지만 텃밭 일은 손사래를 치는 이유다. 요즘 들어 가끔 나는 남자가 결혼 상대로 여자를 택할 때 사랑 이외의 어떤 조건을 추가한다면 다른 무엇도 아닌 육체적 힘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덩치와는 달리 늘 힘이 부족하다. 나는 칼을 들고도 내가 상대해야 할 무나 배추에게 쩔쩔매며 끌려가는 나를 발견하고 당황스러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순간 나는 내게 슬그머니 보아가 난다. 


텃밭을 구입할 당시엔 남편의 퇴질 후에 그 자리에 집도 짓고 꽃도 가꾸며 살기엔 적당할 크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적당한 크기란 남편이 퇴직을 한참 앞둔 구입 시점의 시력에 맞는 크기였다. 더구나 남편 퇴직 후에는 현재 살고 있는 곳에 정리할 일이 남아 있어 차일피일 미루다 시기를 놓쳤다. 


시간은 홀로 흐른 게 아니었다. 남편과 나의 육체적 젊음도 시간과 함께 흘렀다. 주말 텃밭만으로도 우리 네 식구 먹을 푸성귀는 넘치도록 풍성해서 이웃에 나눔 하기를 즐겼던 시절도 옛일이 되었다. 남편이 비료 포대를 안아다 씨앗 심을 자리에 부릴 때 힘든 척하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땅이 풀리기 시작하면 텃밭에 가자고 남편을 채근하던 나를 내려놓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아이들이 각자 가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나니 이제 그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즐거워하는 입도 넷에서 둘로 줄었다.




나는 철이 없다. 


부활절임에도 나는 텃밭으로 향할 것이다. 텃밭에서 일을 해야 할 나이 든 노새 같은 남편을 위해 물과 커피를 준비한다. 5월 초순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이번에 묻어야 할 씨앗 몽땅 묻기로 한다. 작년에 거두어 보관 중인 생강과 울금을 살핀다. 몇 개는 썩었으나 대부분 봄맞이 준비인 듯 하얀 싹을 내고 있다. 나눔 받은 단호박 씨앗과 토마토 씨앗, 열매마, 매운고추 씨앗 외에 양귀비 씨앗과 세이지, 리아트리스 씨앗을 차례로 정리한다. 여주 씨앗은 물 불림할 시간 여유가 없으니 깡마른 상태에서 펜치로 발아할 부분의 껍질을 조심스럽게 잘라준 다음 물을 적신다. 


오이 씨앗은 이번에 대여섯 개만 심고 나머지는 시간 차를 두고 텃밭에 갈 때마다 몇 개씩 심기로 한다. 씨앗을 묻은 후엔 며칠 내로 비가 와 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함께 가져 본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세상은 그래도 마음 나쁘지 않은 사람 편인 것만은 사실이다. 스스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 이 철없음이야말로 연중 행사처럼 텃밭엘 다녀오면서도 해마다 텃밭을 가꿀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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