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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Jun 06. 2022

어느 날인가는 나도 오래된 티브이처럼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며칠 전부터 티브이 리모컨이 말을 듣지 않았다. 리모컨을 주문했다. 새 리모컨도 말을 듣지 않았다. 첫 주문한 리모컨을 반납하고 또 다른 리모컨을 주문했다. 두 번째 도착한 리모컨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티브이 에이에스를 신청했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상담원과의 통화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티브이 에이에스 전화 1544-****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연결시켜주면 될 일을 왜 그리도 다양한 안내 멘트와 여러 과정을 필요로 하는지 성질 급한 사람은 도무지 제 명대로 살 수가 없겠다. 어렵사리 성질을 죽여가며 기다려도 지나치게 오래 기다린 탓인지 전화가 끊겼다. 그것도 두 번씩이다. 결국 남편이 가깝지 않은 대리점을 찾아가 에이에스 신청을 하고 왔다. 온라인 에이에스 신청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는 대리점에서 대리점까지 찾아온 고객의 불편함을 눈치채고 편의를 봐준 셈이다.


에이에스를 받으면 오래된 헌 티브이에 어울리지 않게 새 리모컨을 한동안 사용할 생각이었다. 에이에스를 받으면 티브이와 리모컨이 서로 잘 소통하리라고 찰떡처럼 믿었다. 첫째가 사업 시작하면서 보내온 티브이이니 티브이도 우리 부부처럼 늙긴 늙었다.





기사와의 약속 시간은 오전 10시 10분, 나는 11시 30분에는 일터를 향해 출발해야 한다. 둘째에게 보낼 물건을 담아 둔 택배 상자를 들고 업무를 시작하는 9시에 맞춰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창구 소포 접수용지는 아침 일찍 미리 작성해 가방에 넣어 두었으니 택배 보내는 일은 금세 끝날 것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5분을 기다려 택배 상자에 테이프를 두르고 접수용지를 붙이려는데 한 여성이 다가와 자신이 도와줄 테니 접수용지를 상자에 붙이지 말기를 주문했다.


최근 들어 택배 상자에 적힌 주소를 악용하는 예가 많아 접수용지 사용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상대방 주소와 보내는 사람 주소를 입력하면 된단다.

"시행한 지가 얼마 안 돼요. 한 번 입력해 놓으면 범죄 이용 가능성도 차단하고 편합니다."


핸드폰을 열어 네*버를 치고 우체국을 찾아 주소를 입력하려는데 잘 안 된다. 안내하는 분이 결국 창구 직원에게 부탁해서 입력을 하도록 했다. 그동안 나는 티브이 에이에스 기사가 올 시각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기사로부터 전화가 오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했다. 창구 직원 역시 실시한 지 얼마 안 된 제도라며 고객들이 낯설어하신다고 전해주었다. 창구 직원의 주소 입력과 확인 과정을 거친 용지를 택배 상자에 붙이고 파손 주의 스티커까지 붙였다.


그렇게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이다. 우체국을 향해 집에서 출발한 시간과 우체국 밖에서 기다린 시간까지 합해도 택배 부치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 안팎이다.


카드를 넣고 요금 결제를 하면서 비로소 나를 돌아본다. 뭐지? 내 이 안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창구 직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아까 내게 안내를 해 준 분께도 감사 말씀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국장님, 고객님께서 감사 말씀 전해 달라십니다."

화분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분을 향해 나도 손을 들어 보이며 미소로 답했다.


다른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일에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티브이 에이에스 기사가 도착하기까지는 50분 여가 남았다. 그전에 기사로부터 방문 전화가 올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다. 도착하자마자 에이에스 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조바심은 아마 이런 데 있었을 것이다. 다른 고객과의 만남이 일찍 끝난 기사가 다음 차례인 우리 집에 전화를 거는 그런 상태 말이다.

"근처에 있는데 바로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기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만 하면서 말이 또 길어졌다.

"제가 11시(사실은 11시 30분)에는 나가 봐야 하는데 혹시 오래 걸릴 것 같으면 오후로 미뤄도 될까요?"

기사가 말했다.

"바로 찾아뵐 수 있으니까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스스로가 민망하다.


기사가 자신의 리모컨을 눌러 우리 티브이 상태를 확인했다. 기사의 리모컨도 위리 티브이를 정상 작동하게 하지 못했다. 우리 티브이에 문제가 생겼구나 직감했다. 기사가 티브이 뒷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확인하고 누군가와 통화를 한 다음 에이에스 결과를 알려주었다.


"리모컨 문제가 아닙니다. 티브이에 문제가 생겼는데 시간이 좀 지난 제품이라 부품이 없답니다. 티브이 화면 상태도 좋고 다른 데는 아무 이상 없으니 버리시긴 아깝네요. 불편하시더라도 수동으로 사용하셔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기사는 자신의 명함을 내게 건네고 티브이와 같은 회사 제품 일색인 우리 집 가전제품에 네모난 까만 작은 스티커들을 붙여 주었다.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핸드폰을 이 작고 까만 스티커에 대고 안내에 따라 에이에스 신청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무슨 까닭인지 두서없는 오전 상황을 떠올리며 내가 기사의 이 이 뒷부분 안내를 제대로 인지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기사가 현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기사님, 출장비는 어떻게, 송금해 드리면 될까요?"

"출장비는요, 부품도 없는데요."

"그래도 출장 오셔서 차도 안 드시고 출장비도 안 받으시면......"

"다음에 오면 주세요?"

"? "

"다음에 에이에스 신청하시면 그때 또 올게요."

"다음에 에이에스 신청 안 할 수도 있는데요. 또 다른 기사분이 오실 수도 있고요."

기사가 웃었다.


기사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기사는 잠시 생각할 것이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출장비 안 받겠다는 에이에스 기사에게 이렇게 말 많은 고객은 처음이라고. 아니 언젠가도 이런 오래된 가전제품 에이에스를 받았던 고객이 있었다. 그때도 부품이 없어 못 고치고 돌아서면서 출장비를 받지 않았다. 그때 그 댁의 그 오래된 고객도 오늘 이 고객과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고.





에이에스 기사가 실험 삼아 켜 놓은 티브이를 껐다. 오래된 이 티브이처럼 오래 목은 나 또한 언젠가는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수동 조작으로 말 몇 마디라도 나누며 폐기 처분될 날을 기다리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때 이 기사의 말을 내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상태도 좋고 다른 데는 아무 이상 없으니 버리시긴 아깝네요. 불편하시더라도 수동으로 사용하셔야겠습니다.'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작동 이상 없는 지금보다 더 나이든 날을 미리 위로받은 듯 기분이 환해지는 느낍니다. 남편에게 기사가 다녀갔다고, 티브이에 문제가 있는데 오래된 티브이라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다는 기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오전 내내 동동거렸던 내 모습과 오래된 티브이에서 전해져 오는 동질감까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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