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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ug 27. 2022

달걀이 눌었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탁은 가볍고 딱은 똑 부러진다. 그렇다고 너무 약한 닥은 더더욱 아니다. ㅌ이나 ㄸ, ㄷ에 모음 ㅏ를 붙이는 것 역시 나 편하자고 갖다 붙인 것일 뿐 내가 말하려는 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소리나는 글자가 있다면 하는 바람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지만 내 분야는 아니다.


하늘은 구름과 구름 사이를 가르듯 천천히 비를 뿌렸다. 오래 묵은 약보자기 여기저기서 한 방울씩 새어 나오는 귀한 보약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낡은 보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질긴 천막을 쭉 찢고 하늘이 하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저 소리는 어떤 자음과 모음의 조화라야 할까? ㅌ과 ㄸ과 ㄷ의 혼합음에 모음 또한 저만의 독특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데 그걸 찾아내기가 쉽지 않네.  그런데 이 소리는 지금 어디서 나는 걸까? 빗소리를 따라 졸음은 들락날락하는데 어디 먼 데서 나는 소리 같지는 않고 ㅆㅆㅆㅆ쏴 소리보다 명확하게 귀청을 울리는 이 소리는? 


아, 달걀. 졸음이 확 달아났다. 시계를 보았다. 5시 10분 전. 4시 10분까지 삶으면 적당한 반숙이 될 것이었다. 달걀 반숙을 하겠다면서 50여 분을 삶고 있다니. 서둘러 가스 불을 껐다. 노른자는 내가 싫어하는 검푸른 색을 넘어 거의 검게 변했겠다. 잠시 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졸음 가운데 ㅌ과 ㄸ과 ㄷ과 모음ㅏ와 놀던 기억이 무안하다.


순전히 알레르기 약 탓이다. 7월 말부터 잔잔하던 알레르기가 또 도졌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약한 가을 기운을 입추가 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알아차렸다. 이틀 간격으로 알레르기 약을 복용하다가 사흘 간격에서 오늘은 닷새 만에 약을 먹었다. 이 알레르기 약 복용 후엔 졸음이 쏟아질 수 있으니 운전은 금물이다. 그러니 밤에 잠들기 전에 약을 복용하면 잠을 푹 잘 수 있어 좋겠다. 하지만 알레르기 약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가능하면 약을 피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밤에만 약을 복용하게만은 되지 않는다.


거기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크든 작은 자연의 소리다. 비는 내리고 저 소리는 빗소리일 뿐, 내게 하등 해를 줄 이유가 없음이니 졸음을 부른다 한들 무슨 타박을 하겠는가.






마트에 들러 무심코 들고 온 달걀이 메추리알 큰 형님이라 할 만하게 작다. 달걀도 많이 먹는 건 좋지 않다는 기사 내용이 떠올라 작은 걸로 하루 한 개씩만 먹기로 한다. 완숙은 퍽퍽하고 맛이 덜하다. 반숙은 가끔 껍질 까기가 쉽지 않아 다 까고 나면 매끈해야 할 달걀 표면이 너덜너덜한 경우가 있다.  85퍼센트 정도만 익히면 맛도 좋고 껍질도 잘 까진다. 


달걀 15개를 냄비에 담고 물을 찰랑거리게 부은 다음 소금 한 줌 넣고 중불을 켰다. 13분 만에 불을 꺼야지리까지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먹은 알레르기 약에 취해 달걀은 다 익고 달걀을 담그고 있던 물이 다 말라 알에 불 붙기 직전이라는 경고를 알아듣지 못했다. 


냄비 바닥에 닿았던 달걀 껍데기 부분이 탔다. 껍질에 탄 자국이 없는 달걀도 껍질을 까 보면 누룽지가 되어 있다. 밥이야 일부러라도 누룽지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마른 채로 먹어도 맛있고 물을 부어 끓이면 구수한 숭늉도 제법 입에 맞는다. 하지만 눌은 달걀은 질기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달걀을 눌린 전적이 또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눌은 달걀의 식감을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아침 식사에 곁들일 달걀 장조림이 일부는 달걀 누룽지 장조림이 되었다. 그렇지만 남편과 나 아니면 누가 이것을 먹어주겠는가 말이다. 병에 담고 간장물을 한 컵 부었다. 간장과 물을 1:1로 혼합하여 끓여둔 나만의 비밀 아닌 비밀 소스다. 


비는 바람까지 몰고 와서는 방충망을 찢을 듯 거센 기세로 몰아치고 있다. 오늘 첫 꽃을 보여준 코랄림프세이지도 방충망을 통하여 들어오는 첫 빗물 맛에 깜짝 놀란 듯하다. 그래도 이게 진짜 물 보약의 맛이란다. 조금만 더 먹어보렴. 문을 조금 더 열어 두었다. 


내일 아침이면 나와 함께 달걀 누룽지 장조림을 함께 맛볼 남편이 귀가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파트 현관까지 오는 동안 바짓가랑이가 물리 뚝뚝 흐르도록 다 젖었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덕분에 바짓가랑이도 비 보약을 맛보는 영광을 누린다. 


걱정이다. 오후 4시 넘어 한 시간 가량을 컴퓨터 앞에 앉아 꾸벅거렸으니 오늘 밤은 또 얼마나 길게 길게 늘어지며 흐를 것인가. 악순환의 연속인 날들이 가을 입구에 떡 버티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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