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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ug 27. 2022

택배입니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비 소식이 없어 세탁기를 두 번이나 돌렸다. 두 번째 빨래 헹군 물로 화장실 바닥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타일 바닥 물을 쓸어내는데 화장실 밖에 둔 전화벨이 울렸다. 어제 올라왔던 둘째가 기차 타고 내려가는 중이라는 전화일 수도 있다. 아니면 동창 모임에 나간 남편인가? 손발 물기 닦고 나가 전화 받고 다시 들어와 청소를 마저 하느니 빨리 청소 끝내고 나가서 느긋하게 알아보는 게 낫겠다. 필요하면 내가 전화를 걸면 된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현관 벨을 누른다.


  화장실 문밖으로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향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내 소리가 들렸는지 어땠는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도 현관문이 뚫리라는 듯 소리를 친다. 택배란다. 내 말이 현관문을 뚫고 나간 게 맞는 모양이다. 다시 소리를 질렀다.

  "현관 앞에 놓고 가세요."

  저편에서도 다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현관 앞에 뒀습니다."


목소리가 낯익다. 가끔 오는 장애인 택배 직원은 대면하고 물건을 건네고 받았다는 확인 사인도 받는다. 그의 목소리가 아니다. 또 쿠*이나 C* 등 택배회사들은 현관 앞에 물건을 놓고 찍은 사진 전송으로 택배 도착을 알릴 뿐 딱히 현관 앞에서 택배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해가며 바닥 물기를 마저 쓸었다. 이상하다. 택배 도착 시 알림 방법이 바뀌었거나 또 다른 택배회사일 수도 있겠다. 둘째가 엊그제 주문했다는 엄마 아빠 눈 영양제가 도착할 때도 되었다. 어쨌든 택배라 하니 지나치게 서둘러 청소를 마무리할 필요는 없겠다.





큰일 같지 않은 일도 한꺼번에 몰리면 정신없을 때가 있다. 화장실 청소 마무리를 서둘러 끝내고 나와 핸드폰을 열면서 현관문도 거의 동시에 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공사다망하신 남편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며 현관문 앞에 놓인 택배 물건을 집어 들었다. 택배 포장이 영 허술하다. 어쩐지... 남편이 전화를 받는다. 위층 이웃께서 푸성귀 한 자루를 현관문 앞에 갖다 놓으셨다. 그걸 알리기 위해 남편이 전화를 걸었고, 하필이면 나는 그때 핸드폰을 화장실 밖에 두고 화장실 바닥 청소 중이었다. 택배라기에 신경 쓰지 않고 전후 사정을 알고 나니 이웃분의 기지가 고맙다.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라 했더니 택배라는 답을 주셔서 느긋하게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근데 이거 언제 다 먹지?


화장실 청소 끝나면 좀 쉴 생각이었는데 일이 생겼다. 그래도 처음 우리에게 푸성귀를 권할 때처럼 밭(흙)까지 함께 건네시지 않아 다행이다. 풀 속에서 풀과 함께 경쟁하듯 자란 티가 역력한 건강한 푸성귀들이다. 풀잎 몇 개 골라내는 외에는 다듬을 것도 없이 깔끔하다. 들깻잎, 자소엽, 꽃봉오리 올망졸망한 상추, 왕고들빼기, 미나리, 가지, 보라고추 등 총 일곱 가지다. 푸성귀가 담긴 회색 봉지는 영락없는 택배회사 봉지처럼 보였다.






  푸성귀들을 종류별로 분류했다. 분류했으니 다듬고 씻고 데쳐서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내 몫이다. 이 더운 날 이렇게 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다. 자소엽은 먹어본 적이 없어 재빨리 검색했다. 우리 몸 어딘가에 좋지 않은 푸성귀는 없다. 자소엽은 말렸다가 차를 끓여 마시면 좋다는 내용도 있다.

  오늘 나물류는 가지와 보라고추를 제외하고는 대체도 쓴 나물들이다. 질긴 심이 생긴 왕고들빼기와 상추는 따로 골라 씻어 자른 다음 소쿠리에 담아 말리기로 했다. 쓴맛을 즐기는 남편을 위해 잘 말려 두었다 차로 끓여 내면 되겠다. 나머지들은 데쳐서 나물로 만들어 올리면 요즘 입맛 없다는 남편이 좋아하겟겠다. 


  나물을 분류하고 나니 데치기도 전에 지친다. 진보라색 가지가 침샘을 두드린다. 가지 하나를 뽀독뽀독 씻어 반을 뚝 잘라 우걱우걱 씹었다. 날 가지를 어떻게 먹느냐는 이들만 많은 줄 알았더니 나처럼 날 가지를 잘 먹는 이들도 생각보다 많다. 이번 가지는 아쉽게도 야들야들 어린 가지가 아니긴 하다. 그런데도 날 가지의 달콤함은 여전하다. 가지 하나를 날름 먹고 나니 없던 기운도 솟는 것만 같다.

  데친 나물들을 찬물에 헹궈 두고 나물 양념장을 만들었다. 고추장에 고춧가루 섞고 종종 썬 파와 다진 마늘, 매실청, 들기름, 검은깨 흰깨 섞어 만든 양념장으로 가지와 고추를 제외한 나물 다섯 가지를 모두 무쳤다. 다 같은 맛이 날 것 같지만 푸성귀들마다 가진 고유의 맛이 서로 다른 맛을 나게 한다. 특히 자소엽 무침은 내 입에 많이 쓰다. 이 또한 남편이 좋아할 맛이다. 비빔밥에 넣으면 엄지척이겠다.





  나물을 다 무친 후 남은 가지 하나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이번 가지는 쉴 틈 없이 늘어서 있는 일에도 지치지 않고 일을 잘 끝낸 내게 내리는 선물이다.


싱싱한 택배를 전해 주신 이웃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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