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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ug 31. 2022

집수리는 비 오는 날에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아파트 내부 창고와 그 주변 천정에 곰팡이가 피었다. 윗집 보일러실의 미세한 누수가 장기간 진행된 것이 원인이라 했다. 윗집 보일러실 수리 후 우리 집에 흘러든 물기가 완전히 마르기까지 서너 달 동안 기다렸다.


더운 날과 비 오는 날을 피해 우리 집 창고와 주변을 수리하기로 한 날이 오늘이다. 지난주 예보에 의하면 오늘 날씨는 흐리기만 할 뿐 비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어제저녁 날씨 예보는 내일이라는 오늘은 비가 꽤 올 거라고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비 소식 없다는 날이라 해서 찍어 고르고 고른 날 예상과는 달이 비가 오겠단다.


도배 팀이 도착했다. 비는 추적거리는데 도배 시에는 문을 열지 않아야 도배가 들뜨지 않는다는 말에 열어 두었던 창들을 모두 닫았다. 마스크 끼고 긴팔 옷과 긴 바지로 무장한 채 다른 방에서 작업 상황을 가끔 살폈다. 40 중반의 여자 사장님이 알레르기 때문이라는 내가 안 돼 보였나 보다.

"이 정도 비는 공기 중 습도가 높아서 먼지도 덜 날리고 도배도 들뜨진 않을 것 같아요. 문을 열어 두셔도 되겠어요."


재빨리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여는 내게 한 마디 더 하신다.

"베란다 쪽에 계세요. 곰팡이 다 처리하고 도배 시작할 때 말씀드릴게요."





이른 아침 눈 뜨기 직전 벽 하나 너머인 듯 녹두알 구르는 소리가 났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틀리기를 바랐지만 예보대로 비가 오는가 보다. 비를 핑계 삼아 오늘 아침은 걷기를 쉬어볼까. 하지만 잠은 이미 달아났고 우산을 쓰고 둘레길을 잠시 걸었다. 운동화 속으로 스민 빗물에 양말이 약간 젖었다.


아침식사 후 창고와 그 주변 물건들을 다른 공간으로 치웠다. 그러고도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수리 팀이 도착했다. 빗 속이지만 한 시간쯤 더 걸었어도 좋을 뻔했다. 남편이 사다 냉장고에 넣어둔 커피와 음료수를 권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수리 팀의 열정과 인내가 부럽다. 저이들처럼 서로 잘 맞춰 살 일이다.


베란다 문을 열고 비 오는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건너편 건물 초록색 옥상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오늘 옥상은 물광 피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녹두알 구르는 소리를 내던 빗물길은 이제 굵은 콩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도배가 끝난 후에도 비는 그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매일 보는 화초들을 하릴없이 또 살폈다. 호야는 올해도 꽃을 보여주지 않고 지나가려나 보다. 줄기에 뿌리 비슷한 것들만 무성하고 꽃대는 보이지 않는다. 분홍 제라늄 한 송이가 입을 달싹거린다.





"어머니, 이제 도배 시작할 거예요."

여자 사장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문을 열고 살펴보았다. 곰팡이 흔적이 완전히 깔끔하게 제거되진 않았지만 그건 내 기준이다. 수리 팀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들어야 한다.


얼마 전 어느 아파트 드레스룸 천정에서 대변 주머니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지금 이분들이야 내가 보고 있는 데다 급하면 집안 화장실을 이용하면 될 테니 그럴 리가 없겠지만 왠지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네, 고마워요. 음료수 좀 더 드시고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산다는 건 참 많은 걸 요구한다. 살기 위해서는 하필 비 오는 날 집수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사는 동안에는 윗집 보일러실에서 물이 새는 걸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윗집 보일러실 수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또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집에 흘러든 윗집 보일러실의 물기가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산다는 일, 살아있다는 일, 살아가는 일이 갑자기 시들해졌다.




 

"다 끝났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수리 팀이 흩어져 있던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모아 들고 돌아갔다. 지저분하던 천정과 창고가 주변이 말끔하게 변했다. 


수리 팀이 돌아간 후가 더 바빴다. 모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을 집수리 날로 잡은 건 잘한 일이다. 공기 중 습도가 높아 먼지 날림도 덜하고 이런 날씨에는 문을 열어 두어도 도배가 들뜰 염려도 없단다.


쓸고 닦고 쓸고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렸다. 그래도 어디선가 자꾸 작은 뭔가가 날 따라 나오는 것만 같다. 시들해졌던 사는 일이 더 시들해진 느낌이다.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열심히 청소를 해야 한단 말인가. 잠시 다른 세상 한 바퀴 휘 돌아오면 안 된단 말인가.


그래도 좋다. 쓸고 닦고 또 쓸고 닦고 청소기를 돌리고 또 돌렸더니 사방이 반짝거린다. 누가 천 개의 촛불을 하트 모양으로 배열해 놓고 축하를 보내는 것만 같다.


가을이 오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끝냈다. 비에 씻기고 또 씻긴 올가을 단풍은 더 곱고 더 깔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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