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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ug 28. 2022

문득 숭고한 삶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어떤 사람과는 입 한 번 여는 데 몇 해가 걸릴 때도 있는 내가 요즘 둘레길에서 인사 나누는 이들이 늘었다. 한 달에서 몇 개월 정도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다 보니 간단한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 아침엔 5시에 1층 로비에서 같은 동에 사는 5층 주민을 만났다. 딸은 파리 대학교수인데 아들이 치매라 힘들다시던 분이다. 그 후로도 자주 마주쳤고 아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마음 아픈 이야기를 부러 꺼내어 물어보기는 쉽지 않아 인사만 나누곤 했다.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신다. 인사를 나누며 물었다.

"벌써 운동 끝내셨어요?"

"아, 이자 끝나고 올라간다. 열심히 하거래이. 아프지 말고."

"네. 올라가세요."






둘레길로 들어서서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눈 사람은 언젠가 풀어진 신발 끈을 매어 드렸던 어르신이다. 이른 아침 바람결이 차다. 어르신은 검은 카디건을 나는 얇은 등산 점퍼를 하나씩 더 걸쳤다. 옆으로 지나는 내게 한 말씀하신다.

"선선하니 걸을 만하네요."

"네, 머리카락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며칠 사이에 긴팔을 입지 않으면 서늘해요."


조금 더 걷자 당당한 걸음새가 장부 같은 어르신과 마주쳤다. 내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걷는 걸 보고 미소를 지으신다. 내가 손을 들어 보이며 주먹을 세게 쥐어 보였다.

"그래요, 잘 하고 계시네요."

편마비 어르신의 신발 끈을 매어 드리는 걸 보셨는지 그날 이후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녀가 내게 알려준 악력 높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걸을 때 그냥 걷지 마시고 주먹에 힘을 주면서 걸어보세요. 주먹에 최대한 힘을 줄 수 있는 데까지 주면서 쥐었다 폈다 해 보세요. 악력이 좋아진대요. 걸으면서 다리 힘도 키우고 팔과 손힘도 키우고."

그녀의 조언은 가끔 잊곤 했지만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일라치면 바로 주먹에 힘을 주게 되었다.


두 분 어르신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몇 바퀴 둘레길 반환점을 도는 동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웃 동에 사신다는 어르신이 걸어오시며 물으셨다.

"만 보 걸었어요?"

"아뇨, 이제 5천 보 정도 걸었어요."

"빠짐없이 열심히 걸으니까 보기 좋아요.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댁이 걷고 있으면 내려오게 된다니까요."

"아, 정말요. 어르신도 하루도 빠짐없이 걸으시는 거 존경스러워요."

"난 매일 나오긴 하지만 이젠 좀 천천히 걸으려고 해요."

"네. 몸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할 시기인가 봐요."







다시 반환점을 돌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벤치에서 잠시 쉬고 계신 편마비 어르신을 만났다.

"날이 금세 환해졌네요."

"네, 오늘은 하늘이 더 새파랄 것 같아요."

"난 아무리 걸어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네요."

지나치려던 걸음을 멈추고 성한 쪽 손으로 당신의 다리를 주무르시는 어르신 앞에 섰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앉았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나 이거 20년 됐어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 둘레길은 겨우 2년 전 몇 개월에 걸쳐 만들어졌다. 둘레길이 조성되기 훨씬 전 젊었을 나이의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걸음 연습을 하며 지냈을까. 젊은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니 더욱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마비된 손은 주먹은 쥐어지는데 펴지지가 않아서 아무리 자주 씻어도 냄새가 나요. 어떤 땐 그만 걸어버릴까 싶을 때도 있어요. 다 포기하자 싶은 거지요."

왜 안 그렇겠는가. 말이 쉬워 20년이지 나는 1년간 만 보 걷기 열심히 했노라 자랑질도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등에서 손을 떼고 먼 데 하늘을 보았다. 얼마 간의 침묵 끝에 겨우 한 마디 올렸다.

"그래도 나오세요.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안 걸으셨더라면 지금 같은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저보다 항상 먼저 나와 걷고 계시는 어르신이 가끔 안 보이시면 많이 궁금하고 걱정도 돼요. 비 오는 날이나 바람 심한 날 같은 때 말이죠."

"그래요, 고마워요."

그녀가 엷은 미소를 띠어 보였다.





그녀는 둘레길 다섯 바퀴를 돌고 집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면 다음날 새벽에나 나온다고도 했다. 그녀가 목표치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40여 분 정도를 더 걸었다. 사방이 환해지자 낯익은 이부터 최근에 낯을 익히기 시작한 얼굴들까지 둘레길이 제법 북적거렸다.




만 보를 다 채우지 못하고 9천8백 보 즈음에서 나도 집으로 향했다. 나는 왜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걷기부터 시작하게 되었을까. 걷기를 하기 전 나는 이 시각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둘레길 걷기 전엔 이 시각이면 잠에서 일찍 깬 날이라도 대체로 뒹굴거리거나 별 변화 없는 하루 이른 아침을 베란다 화초들과 마음을 나누는 정도였다. 


이른 아침 걷기를 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화초를 돌볼 시간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짧은 시간에 더 집중해서 화초를 돌보는 나를 발견한다. 이른 아침 매일 글 한 편을 쓰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도 화초는 돌볼 수 있었다. 내가 화초 전문가가 아니며 화초를 생계수단으로 삼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일의 반복을 심히 단조롭다고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지극히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누구나 언제나 동분서주의 박력 있는 삶을 살 수는 없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이 상황이 지금의 내게는 가장 알맞은 삶이다.





남편과 먹을 주말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이따금이긴 하지만 주말 1박 2일을 동창 모임에 바쳐야 한다는 남편을 예전에는 놀기 좋아하는 탓으로만 돌렸다. 조금 더 살아보니 우리 모든 삶의 모습이 놀이 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또한 아무리 좋은 놀이라도 힘이 없으면 즐길 수 없다. 힘 있을 때 즐기시기 바란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려 본다. 


지금쯤은 텃밭에 김장 무와 돌산 갓 씨앗, 쪽파 종근 정도는 묻어도 좋겠지만 동창 모임도 오늘 내일이 아니면 안 될 이유가 있겠다. 언제부터 이처럼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산스럽게 놀이터를 향해 떠났다.


나이가 든 것이다. 내 시간도 남편의 시간도 쏜살같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것도 지나가고 있는 것도 앞으로 지나갈 것도 새로운 눈으로 보면 이 이상 지극할 수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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