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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Sep 04. 2022

쓸 데 있다고 우기고픈 잡생각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수박 한 덩이 사다 놓고 알바 다녀왔더니 달궈진 몸의 열기가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씻고 누워 걸음 수를 보니 15,887보를 걸었다. 1만 보가 내게는 딱 적당한 걸음인데 1.5배를 넘겼으니 무리를 해도 많이 했다. 과일 몇 쪽 먹고 누워 빈둥거렸다.


일어나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겨우 추스리고 일어나 빨래 몇 가지 접어 놓고 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할 일이 태산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 날이냐.


다섯 시가 넘어서야 일어나 접어 놓은 빨래를 겨우 제자리에 넣었다. 컴퓨터가 아침부터 약간의 말썽을 부려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일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시절이다.





전날 도착한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의의 땅 관련 문서를 꼼꼼히 읽었다. 이의신청을 해야겠다. 세상 모든 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하다고 생각하게 한 할아버지,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남편이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온다는 전화다. 참외 하나 깎고 떡갈비 한쪽과 어린 조기 한 마리를 뜯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의 저녁식사다. 하지만 그냥 눈에 띄는 것으로 제시간에 맞춰 식사라는 한 가지 일을 의무적으로 해결했다. 딱히 번아웃일 이유가 없는데 번아웃이 아닌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열 시 반밖에 안 됐는데 눈이 절로 감겼다. 오래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일 수 있다. 누가 잠을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닌데 젊어서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니 병은 병이다


일찍 잠들었으니 일찍 깨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눈떠 보니 다음날 새벽 2시다. 몸의 열기는 내렸고 다시 잠에 들기 위해 뒤척거리다 잠든 듯 꼼짝 않고 있어도 보았으나 일단 달아난 잠이 다시 찾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어났다. 다시 거뜬해졌다. 다행이다. 오후 내내 빈둥거리고 일찍 잠을 청했다 일어난 덕분인가 보다. 몸이 가는 대로 마음이 따라주어야 함이 옳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옳다. 상황에 따르면 된다.


밝고 통통한 그믐달이 별 하나 데리고 나와 새벽 구경을 하고 있다. 누리호가 성공 발사되었고 조만간 달 탐사선을 보낼 거라는 소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달에 도착하면 지금껏 달에 가 본 누구도 만나지 못했던 토끼 두 마리가, 처음부터 두 마리일 뿐인 토끼 두 마리가 여전히 떡방아를 찧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랫녘엔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다. 습한 더위가 내 새벽까지 몰려든다.


전날 사다 놓은 수박을 살펴보았다. 암수박을 고른다고 골랐는데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수박은 다 맛있지만 그 중에도 숫수박보다 암수박이 맛이 있고 암수박은 꽃 진 자리가 있는 듯 없는 듯 작아야 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정작 수박을 고를 땐 수박은 다 맛있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나 보다. 수박을 굴려 꽃 진 자리를 살펴보니 있는 듯 없는 듯하기는커녕 가장 최근에 나온 1원짜리 동전만은 하다. 숫수박이지만 '얼마나 맛있게요'라고 광고라도 찍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암수박에 비해 맛이 덜할 숫수박 한 덩이 그래도 잘 자라서 내게까지 왔으니 그럼 됐다.





어렸을 때는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수박이나 참외, 오이 등을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손사래를 칠 정도로 싫어했었다. 그런데 요즘 수박, 참외, 오이가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식성이 변한 것일까, 살이 찌려고 물기 많은 식품에 빠지는 것일까.


새들이 새 날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여름이면 내 새벽을 깨우는 변함없는 새들이 오늘은 나보다 늦게 일어났다. 아무리 부지런한 새들도 어느 정도는 잠을 자야 한다. 전날 일찍 잠들어 새 날이 시작된 지 두 시간 만에 잠에서 깬 내 잠에 대해 새들이 알 리 없다. 재가 잘 시간만큼 자고 일어난 것이다. 


내게는 얼굴 따로 노래 따로 노는 저 새는 지금 한창 목을 푸는 중일 테지만 내 귀엔 이따금 '목 아프다, 목 아프다'로 들린다. 목 아프게 노래하는 새들이 길 건너로 날아간 모양이다. 새 소리에 엷은 안개가 낀 듯 약간 희미해졌다.


네 시를 넘어간다. 아랫녘엔 비가 오고 있나 보다. 별은 사라지고 밝고 통통하던 그믐달 가장자리는 구름에 물들었다. 하늘에는 오늘도 오늘의 푸른 기운이 자라나는 듯한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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