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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Sep 04. 2022

잠시 재수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아침에 커피를 타려고 보니 냉장고에 우유가 없다. 어제도 마트에 들렀으나 과일만 사고 우유 사는 걸 깜빡했다. 내가 즐겨 마시는 라테 커피는 마트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라테 커피지 커피 잔에 알갱이 커피 한 작은 스푼 넣고 뜨거운 물 1/4 정도 부은 다음 우유를 컵에 찰랑거리도록 부으면 끝이다. 알갱이 커피는 뜨거운 물을 부으면 쉽게 녹는데 뜨거운 물 조금 붓고 바로 찬 우유를 섞으면 아직 덜 풀린 커피 알갱이들이 우유와 섞이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서로 스미기 위해서는 적어도 딱딱한 상태는 아니어야 한다는 데 마음이 미치면 오늘 하루도 부드럽게 시작할 수 있을 듯하다.


텃밭 오갈 때 쓰는 백을 뒤졌다. 간식거리나 점심 반찬 등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보냉 백으로 오래 전 커피를 살 때 덤으로 받은 사은품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벌써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 수준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와 인연을 맺은 이상 유통기한이 다음 다음 생까지 이어질 수도 있음을 이미 알아채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언젠가 그러니까 지난 계절 언제쯤인가 이 백에 일회용 믹스 커피를 몇 개 넣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필요한 거라면 어떻게든 찾아내는 재주를 가진 내가 이 아침엔 특히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평소엔 설탕을 멀리 하지만 텃밭 일로 진이 빠질 무렵이 되면 가끔 달달한 것이 땡긴다. 특히 더위에 지쳤을 땐 수분과 당 보충으로 가장 간편한 것이 믹스 커피다. 이런 때를 위해 믹스 커피를 몇 개 준비해 두고는 텃밭밭 일을 줄이고 소홀해지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믹스 커피 또한 유통기한을 넘겼을 수도 있겠다.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믹스 커피를 구입할 때의 유통기한이 적어도 몇 년 후 미래의 어느 날을 기한으로 하고 있는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커피가 있다. 그런데 달랑 하나다. 오늘처럼 우유가 똑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커피는 아니었지만 하나라도 남아 있어 우유가 없는 이 아침 요긴하게 쓸 수 있겠다. 언젠가를 대비해 뭔가를 저장해 둔다는 건 좋은 일이다. 딱 그 언젠가에 들어맞지 않을지라도 그 유사한 경우에 사용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통기한이 어디 적혀 있나 살펴 보았지만 이 작은 낱개의 봉지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먹을 것 앞에서는 유통기한에 찜찜해지지 않을 수 없지만 오늘은 내 오장육부에 양해를 구하고 먹기로 했다. 더구나 함께 마셔줄 동지인 남편이 있어 다행이다.


이윽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믹스 커피 한 봉지를 큼직한 남편 컵에 붓고 뜨거운 물을 2/3 정도 부은 다음 스푼으로 두어 번 휘저은 후 작은 내 컵에 반을 따랐다. 분명 싱거울 맛이다. 달걀 반숙 장조림은 반을 갈랐다. 노른자가 약간 흘러내릴 정도로 잘 됐다. 만두는 프라이팬에 물을 약간 붓고 자작자작 굽듯이 익혔다. 기름을 두르고 구워 냈을 때에 비해 바삭한 식감은 아니지만 부드러워 좋다. 만두 소스는 따로 마련하지 않고 달걀 반숙 장조림 국물에 찍어 먹었다. 





비 소식이 있어 아침식사 후 비 오기 전 동네 한 바퀴 돌고 올라왔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오늘 아침 못 마신 아쉬운 커피 생각이 나고 무척이나 졸리다. 졸리면 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잘 안 되는 걸 알기에 자리에 눕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앞에서 꾸벅거리다 오늘 일요일에 문을 여는 마트를 검색했다. 


가까운 데 크고 작은 마트들은 오늘이 영업을 쉬는 일요일이다. 세 블록이나 떨어진 작은 마트만이 오늘 영업을 한다. 시간 맞춰 다녀와야겠다. 그럼에도 가까운 데 다른 마트들이 오전 10시 오픈인 데 비하면 오전 9시 오픈은 생각잖게 주어지는 보너스처럼 반갑다. 하늘을 살폈다. 시꺼먼 구름 떼가 머리 위에 머물며 언제 비가 되어 뛰어내릴까 망이라도 보는 듯하다. 갑자기 최근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았다. 크게 죄가 될 행동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누군가 죄를 뒤집어 씌우지만 않으면 무난할 것 같긴 하다. 비가 오기 전에 마트에 다녀올 생각에 별 시덥잖은 일까지 끌어들인다.


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비들이 한꺼번에 뛰어내리기 전에 달려 다녀와야겠다.재수 좋으면 마트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동안 비와 만날 수도 있겠다. 비를 만난대도 대수겠는가마는 내가 마트에 오가는 동안만은 재수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하늘로 올려 보낸다. 둥둥 재수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마음 나쁜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풍선을 타고 날아오른다. 





한시바삐 우유 넣어 부드럽고 밍밍하게 식은 커피를 마시고 싶다. 경보 연습이라도 하듯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마트에 도착했다. 오픈 시간에 맞춰 올라가기 시작한 마트 철제 문이 꼭대기에 닿는 순간이었다. 


바람대로 정말 재수가 없었다. 내가 우유 두 팩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물을 끓이며 막 커피 잔에 알갱이 커피 한 작은 스푼을 넣고 뜨거운 물을 1/4 정도 붓고 컵이 찰랑거리도록 그러나 넘치지는 않도록 우유를 따른 다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컵 입술에 내 입을 갖다 대고 한 모금 후룩 빨아들이는 순간 번개가 쳤다. 뒤이어 우르릉 쾅 천둥이 치는가 싶었는데 쏴아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졌다. 모든 것이 순간이라고 할 만큼 눈깜빡할 사이에 진행되었다. 아직 커피 잔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한 모금 더 후루룩 빨아 마셨다. 이 맛이다. 이 밍밍하면서도 부드럽고 미세한 떨림 같은 단맛에 중독되어 재수없기를 바라면서까지 먼 데 마트 오픈 시간에 맞춰 종종걸음을 치면서 다녀온 이유다. 마음을 다해 허리를 굽히고 커피 두 모금을 마셨다. 커피가 쏟아지지 않을 만큼 줄었다.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비가 제법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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