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꾸

by YUJU
내 논문은, 나의 얼굴이다.


어떤 대학원 후배를 상담해 준 일이 있었다. 의욕은 보이지만 석박사생의 당면 과제인 대학원 공부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공부 이외의 많은 일들을 벌리는 스타일이라 결과적으로 공부의 질이 떨어지는 친구였고, 공부의 깊이가 깊지 못해 교수님들께 몇 번 지적받았던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터라 나 또한 그 점을 지적해 줬다. 공부는 어쨌든 물리적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그 시간에 대한 나의 꾸준함과 성실성이 결국 논문의 질로 연결된다고. 이 점에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왕도는 존재할 수 없다고. 그러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친구가 말했다. "굉장히 꼰대 같은 이야기이시네요."


나는 정말 놀랐다. 대학원생부터는 공부를 업으로 삼는 전문 연구자이고, 연구자의 직업윤리 상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성실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무려 '꼰대'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뿐만 아니라 아직 나이도 어린 친구가 '어떻게 하면 학계에서 인정받는 질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빨리, 원하는 학위를 딸 수 있을 것인가'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결국 그 친구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요행적 가치관을 가진 연구자의 길로 영영 떠났다.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이들의 그 치열함이 굳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어느 학교, 어느 학계에 있던 자기 이름 앞에 달리게 될 '후루꾸'라는 오명을 벗기는 힘들 것이다.




어제 내가 소속된 학계에서 정말 엄청난 학문적 성과를 가지고 계신 교수님과 함께 밥을 먹었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다. "OOO 교수 그 사람은 후루꾸야." 후루꾸, 라는 말이 가슴에 콱 와닿았다. 학계는 실력 있는 연구자와, 그렇지 못한 연구자를 가르는 것에 몹시도 냉정하다. 회사에서는 복잡한 조직 체계 속에 프리 라이더가 숨죽여 은신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학계에는 실력에 대한 비밀이 존재할 수 없다. 연구자의 활동은 엄연히 개인플레이이고, 모두가 자기 프로필에 본인이 어떤 주제로 박사를 받았으며,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계 내에서 어떤 직을 맡게 될 때마다, 그 연구성과들은 이름 밑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동료 연구자들이 그것을 보고 나와 내 연구의 질을 언제든 수시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누군가의 실력은 금방 바닥까지 투명하게 드러난다.




교수님 말씀을 들으며, 암담하게만 느껴졌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비로소 뚜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다. 지금까지 연구자로서 무엇이 되느냐의 문제에만 골몰해 왔지만, 사실은 무엇이 되지 않느냐가 더 크리티컬한 문제였다. 차라리 실력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실력도 없으면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욕심만 부리는 후루꾸는 연구자가 들을 수 있는 말 중 가장 치욕적인 표현이다. 연구사에 ‘후루꾸 연구자’로 남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은 금방 사라지고 없어지지만, 글은 토시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박제되어 남아버린다.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는 한 영원히. 그래서 나는 5년이 걸려도, 10년이 걸려도, 성실한 박사논문을 써내어 내 얼굴에 나 스스로 침을 뱉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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