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만 '사기'에서 구하소서
내가 정말 나이를 먹긴 먹었는지, 30대에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사기'라는 걸 40대 초반에 연달아 두 번이나 당하게 되었다. 원래도 사람을 쉽게 믿는 편은 전혀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뒤통수를 맞고 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심장을 바쳐서라도(신조오 사사게요!) 빼앗긴 내 돈을 다시 찾아내야 하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생겼다. 결국 내가 대학원 짬밥을 15년 먹어가며 축적해 놓았던 모든 지식과 법과 기술을 동원해 두 번 다 100% 전액 환불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지금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고단하고도 집요했던 ‘환불의 대서사시’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이사를 앞두었을 무렵, 로봇 청소기를 찾다가 공구 가격으로 50% 가까운 할인을 보장한다는 한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카카오톡 배너 광고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곳이어서 너무 쉽게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공구 가격으로 카드 구매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우연히 뉴스에서 그 쇼핑몰을 보게 되었다. 로봇청소기 판매 전부터 이미 어그부츠, 에어팟을 말도 안 되는 저가에 팔아놓고 결국 미배송 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차 싶어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카드사에서는 쇼핑몰에 대금 지급이 이미 완료되었다며, 카드사로서는 이 상황에 대해 분쟁접수 밖에 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나는 통장에서 이번 달에 쓴 카드비가 아직 빠져나가지도 않았는데, 누가 카드 소유주인 내 허락도 없이 그 업체에 돈을 줬는지를 따졌지만, 구매 후 일주일이 지나면 카드회사에서 금액을 지급하도록 되어있어 거래 취소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환불 처리는 무조건 판매자가 직접 하지 않는 이상 카드사가 임의로 진행할 수는 없으며, 카드사에서 강제로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환불 방법인 '할부철회·항변권 신청'은 20만 원 이상, 3개월 이상의 할부 거래를 이용한 경우에만 가능한지라 로봇청소기를 일시불로 구매한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쇼핑몰 홈페이지 고객센터는 이미 마비상태, 전화도 불통이었다. 카톡을 뒤져보니 500여 명의 피해자들이 모여서 만든 오픈채팅방이 개설되어 있었다. 품목은 어그부츠와 에어팟이 주였던 터라, 100만 원 이상 고가의 제품을 구매한 나로서는 피가 마르고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다들 한국소비자원, 각자의 카드 회사에 항의한 내용을 공유하느라 바빴지만 카드사도 소비자원도 그 어떤 공권력과 단체도 해당 쇼핑몰에 환불을 빨리 처리하라는 압박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그마저도 쇼핑몰 대표가 받은 돈을 가지고 해외로 잠적해버리기라도 하면 환불을 도와줄 방법은 아예 없었다. 게다가 쇼핑몰 대표는 구속을 면하기 위함인 듯 하루에 몇 명씩은 실제로 환불을 진행해 주며, 정상 운영의 의지를 보이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광고를 실어준 카카오톡도, 카드회사도, 소비자보호원도, 경찰도, 국민권익위원회도, 업체가 위치한 전주시 공무원도 모두가 환불에 대한 확답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을 겪은 뒤, 그때부터 환불 과정에 대한 치열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온라인 결제를 대행하는 PG사의 존재였다. 사건이 심각해지고 환불 지연에 대한 소비자의 항의가 이어지자, 쇼핑몰과 직접 계약한 2차 PG사(외주의 외주)에서 직원을 현장에 파견하여 환불 조치를 감독한다는 희망적인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환불 과정을 감시하고 진두 지휘해주었으면 하는 소비자의 애타는 바람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PG사 직원들이 현장에 파견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지난한 환불의 과정은 마침내 결제대행사의 '카드 취소 전표발행 및 대금 입금완료' 관리 감독에 대한 책임회피를 금감원에 고발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다행히 환불이 점차 속도를 내고 있을 무렵이긴 했지만, 내가 그나마 환불을 빨리 받게 된 건 누구보다 처절했던 몸부림들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카드회사로부터 거래 취소 문자를 받기까지, 약 한 달간 눈만 뜨면 시작되는 민원과 검색 지옥 속에서 아까운 시간을 날리며 맘고생 한 것은 단 한 푼도 되돌려 받지 못했다. 대표라는 인간은 당시에 그렇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도 잘만 살고 있는지, 최근에 쇼핑몰 이름을 다시 한번 검색해 봤더니 이 쇼핑몰이 사기라는 걸 알려준 고마운 공익 블로거를 고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 인혐 돋네 정말.
두 번째 이야기
“한 번 속는 건 그 사람 잘못이지만, 두 번 속는 건 내 잘못이다.”라는 말이 있다. 역시 조상님 말은 틀린 게 없는 것인지, 최근에 또 쇼핑몰 업자에게 눈탱이를 맞아버렸다. 이번엔 폐업한 쇼핑몰이 쇼핑몰을 계속 운영하며 카드 결제를 유도한 상황이었다. 쇼핑몰이 망했는지 꿈에도 모르고 있던 나는 매우 정상적 이어 보이는 쇼핑몰에서 정상적으로 결제를 했지만, 전에 하도 씨게 맞은 기억이 있어서인지 왠지 싸한 느낌이 들어 거래 3일 차 되는 날 쇼핑몰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뿔싸. 쇼핑몰에 올라와있는 글들이 전부 2022년 무렵이었다. 지도로 업체를 찾아보니 웬 시골 농가가 나왔다. 부랴부랴 전화를 해봤지만 회사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나오고, 대표로 추정되는 사람의 휴대폰은 울리긴 하지만 받지 않았다. 아, 또 시작이네 이거. PTSD가 올라와서 울화통이 터졌지만, 한편 그 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매뉴얼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나는 바로 카드회사에 전화를 걸어 분쟁 접수를 했다. 그렇게 당해놓고서도, 이번에도 나는 할부 구매를 하지 않고 일시불 구매를 해버렸다. 어차피 할부 구매를 했더라도 총액이 30만 원이 넘지 않아 할부철회·항변권 신청은 할 수 없었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에스크로는 했었어야 했는데, 역시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속은 것에는 '대가리 빠가사리' 같은 나라는 이유가 있었다. 소비자보호원에 전화해 업체의 사업자 등록증 번호를 조회해 폐업 사실을 확인한 후 곧바로 신고하고, 지체 없이 PG사에도 전화를 걸었다.
다행인 건, 내가 폰지사기를 당하고 난 후 또다시 쇼핑몰 업자에게 눈탱이를 맞게 된 바로 그 사이에 마침 티몬/위메프 사건이 크게 터졌고, 그 후로 우리나라에도 꽤 좋은 시스템이 생겨서, 내가 이전에 환불을 받기 위해 아무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만 했던 각종 개고생을 할 필요 없이 PG사에서 카드 결제를 보류하거나 취소하는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번엔 불량 업체라는 사실을 빨리 눈치챈 탓에, 대금 납부일이 지나기 전인 일주일 안에 PG사에 결제 취소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전과 비교하면 어마무시한 속도로 쉽게 결제 취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 다시금 느낀것은, 에스크로의 중요성이다. 에스크로가 내가 찾던 바로 그 '배송 확인 후 결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만약 구매자가 상품을 받지 못했거나, 상품에 문제가 있어 환불을 요청할 경우, 에스크로 사업자가 보관 중인 대금을 판매자에게 지급하지 않고 구매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상거래법에 따라 10만원 이상의 현금 거래에 대해 에스크로 또는 소비자피해보상보험 가입이 의무화되어 있다. 인생에 이렇게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일 없이, 일일이 부딪혀가며 깨달아야 하는 개고생 없이도 사기를 피하려면, 에스크로가 답이다.
읽다가 머리 아픈 분들을 위한 1줄 요약
에스크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