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일종의 돌파구로 누가 봐줄 리 만무한 장문의 육아일기를 블로그에 하염없이 써재끼곤 했던 암흑의 시절이 있었다. 뜻밖에도 같은 처지에 놓인 엄마들이 하소연과도 같은 내 글을 읽고 응원과 공감의 댓글을 달기 시작하면서 블로그가 조금씩 유명세를 탔고, 조회수가 높아지자 어떻게 알고 육아용품 회사들에서 협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협찬을 받은 물티슈를 광고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역시 애 때문에 스트레스를 오지게 받았는지 어쨌는지 정신줄을 반쯤 놔버린 것 같은 어떤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물티슈가 한 번에 여러 장이 뽑힌다는 말 같지도 않은 컴플레인을 걸며(Why me?) 욕이 섞인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싸움이 붙어버렸다. 이미 블로그 운영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던 나는 홧김에 블로그를 닫아버렸고, 그 이후로 다시는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았다.
블로그 운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몰랐다. 내가 블로그 이웃만이 아니라 나의 '글쓰기'를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물론 직업적 특성상 글쓰기는 그 이후에도 숨 쉬듯 이루어졌지만, 나의 일상과 가치관을 담은 글쓰기는 7년 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몇 주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김누리 교수의 '후기 파시즘'에 대한 대담을 듣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느꼈다. 아, 이거 딱 그 느낌이네. 나 지금 글 마렵네.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기는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글을 쓸만한 곳을 찾아보다가 브런치를 떠올렸다. 글을 중단한 7년 동안 내 지식 정보 원천의 생태계는 많이 바뀌어 있었고, 나는 그때에 비해 책 보다 유튜브를 통해 지식을 얻는 비중이 훨씬 높아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려고 하니, 그때보다 적확한 단어를 떠올리고 유려한 문장을 구성하는데 버퍼링이 훨씬 더 심해졌다. 마치 어딘가에서 오랜 기간 방치되어 녹슨 기계를 시험 삼아 돌려보는 것 같은 이 긴장과 불안이 낯설고, 조금은 슬프다.
왜 나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만든 것이 하필 '후기 파시즘'이란 말인가. 이 한 단어보다 작금의 비뚤어진 한국 사회와 교육 현실에 대한 나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단어가 없다. 쓰려면 읽어야 한다. 읽고 나서 치열하게 사유해야 한다. 사유하고 문장을 정제해야 한다. 정제하고 기록한 뒤에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전공과 관계없는 글을 쓴다는 건 사치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이런 종류의 사치라면, 가끔은 허락을 받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