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폭력

by YUJU

세계 전체에서는 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유독 한국인들이 사용하기 좋아한다는 '우리'.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 교회, 우리 정당, 우리 지역, 우리 민족, 우리 나라.

한국인들이 숨 쉬듯 사용하는 '우리'라는 감각에 대해서는 이미 그 특이성을 분석하는 여러 분야의 책들이 나와있기에, 문외한인 나까지 굳이 말을 덧댈 필요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폭력을 대할 때마다 나 만큼이나 지겨워하고 숨 막혀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아직까지도 참 드문 일이라는 것이 새삼 놀랍다.


'우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아닌 것부터 구분지어야 하기에, 결국 모든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을 가르는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가 작을수록 우리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한 혐오의 폭은 얼마나 넓어지는가.

'우리'가 강할수록 우리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한 혐오의 힘은 얼마나 더해지는가.

그렇기에 '너머'에 존재하던 이들은 필사적으로 '우리'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고,

우리에 껴 들어간 이들은 이젠 '너머'의 인간들을 더 필사적으로 혐오하기에 이른다.


나이가 사십이 되면서,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이 철이 들게 되면 이전과는 좀 다른 관계를 맺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십이 되어 맺은 관계들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였고, 너머는 너머였다.


우리에 포함되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의 대상.

우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사람은 배척의 대상.




몇 년 전, 내가 신학을 배우던 때 신학생들로 구성된 북클럽에서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으며 '무조건적 환대의 현실 가능성'에 대해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인적이 있었다. 종교성으로 무장된 신학생들 마저도 무조건적 환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왜 그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는지 생각이 뚜렷이 정리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그 이유는 '우리'가 태생적으로 가지는 폭력성의 한계를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즉 '사회적 성원권'을 준다는 것은 '너머'의 누군가를 '우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 자체가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힘에 의해 구성된 것이므로, 환대는 배타성과 폭력성의 연장이 되고, 그래서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무조건적 환대가 불가능해지는 모순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전체주의적 폭력을 합리화하는 사회 속에서, 누구의 무엇도 아닌 나로 사는 삶을 지켜내는 일은 그 자체로 어쩌면 자기 파괴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갔던 지혜로운 철학자들의 통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존경을 표하고 싶은 그들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것에서 생기"며,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하여 나는 절대로, 나의 삶 속에서 ‘우리’라는 것이 나를 함부로 잠식하도록 스스로를 방치하고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독거노인으로 고독사한다’는 저주 섞인 우려가 내 비루한 운명에 굴레 씌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글이,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