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다 못해 잔인한 한국식 조기교육이라면 치를 떠는 나지만, 이런 나조차도 우리 딸에게 유일하게 시행한 조기교육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디어 교육이었다. 바야흐로 기계와 한 몸이 되는 트랜스 휴먼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남들이 다 하는 스마트폰 사용금지와 같은 구닥다리 교육은 일찍이 지양하고, 유튜브를 거의 무제한으로 보여줬다. 아이는 유튜브를 보며 혼자 한글을 떼고, 알파벳을 배우고, 수 개념을 익혔다.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근육 발달은 로블록스 타워게임으로 끝냈다. 딸이 7살이 되었을 무렵, 프세카라는 리듬 게임 하나로 아빠를 비롯해 게임 좀 한다는 동네 2-30대 삼촌들을 죄다 찍어 눌렀다. 주변에서는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애가 게임 영재인 것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고.
미디어 교육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워낙 조기교육이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래 친구들보다 선행이 불가피해졌다. 서너 살 또래 친구들이 한참 뽀로로에 빠져있을 무렵, 아이는 디즈니 만화 대다수를 섭렵했다. 예닐곱 살이 되자 다른 집 딸 가진 부모들이 파산핑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동안, 아이는 유튜브에서 '귀멸의 칼날' 쇼츠를 찾아보며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집은 티니핑 대신 귀칼의 네즈코 코스프레 옷을 사주는 정도로 파산을 면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피규어의 개미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한번 일본 애니에 입덕하자, 그 뒤로는 일본 애니의 장대한 세계관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칼을 시작으로 스파이 패밀리, 최애의 아이, 체인소맨, 주술회전, 지박소년 하나코군을 거쳐 명탐정 코난과 진격의 거인을 섭렵했을 무렵, 나에게도 아이와 대화를 하려면 일본 애니메이션에 정통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부여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마침 대학원 졸업시험 요건으로 JLPT N2 합격증이 필요했던 나는, 일본어 청해를 명분으로 일본 애니의 세계에 푹 빠졌다. 진격의 거인을 정주행 하고 난 뒤, 우리 집 가훈은 이렇게 바뀌었다. "世界は残酷だ。"
그런데 안타깝게도 딸은 애니를 절대 정주행 하는 법이 없었다. 대부분 쇼츠나 짧은 유튜브 리뷰영상, 핀터레스트로 이미지를 소비하는데만 그쳤다. 스즈메의 문단속과 같은 2시간짜리 영화는 꾹 참고 보더라도, 몇 기 몇 쿨로 줄거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부분의 일본 애니들은 10살도 안된 아이의 입장에서 끝까지 보기에는 호흡이 너무 긴 모양이었다. 애니의 깊은 세계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겉핥기식으로만 '보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어차피 아이가 보는 대부분의 만화는 관람 가능 연령이 19세 이상이기에, 건전한 내용만 허락되는 쇼츠가 차라리 더 낫다고 판단했다.
어느덧 줄줄 외울 수 있는 애니 OST와 J-pop이 몇십곡으로 늘어나다 보니, 일본어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는지 공부를 그토록 싫어하는 아이가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확실히 관심이 있으니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한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살고 싶은 나라, 유일하게 유학 가고 싶은 나라도 물어보면 일본이 되었다.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목적지가 도쿄 아키하바라와 오사카 덴덴타운이 되고, 여행의 목적이 피규어 수집이 되고 있는 게 살짝 아쉽게 느껴질 찰나, 이젠 일본 시골 한복판에 휑뎅그렁하게 놓여있는 코난 박물관과 진격거 박물관을 가자고 조르고 있다. 아아, 참된 덕후가 되기 위한 길은 정말 산 넘어 산이다.
아이는 이렇게 조기덕후 교육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마침내 훌륭한 최연소 덕후가 되었다. 최근의 장래희망을 물어보니 '괴도키드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국내 현존하는 덕후 중에서도 덕력으로 상위 1%에 돌입한 것 같다. 조기교육에 성공해 마침내 아이를 명문대 보내는 엄마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둘째가라면 서러울 한 명의 멋진 덕후로 성장 중인 내 딸을 보면 보람과 뿌듯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공부, 공부, 공부. 오로지 공부에만 미쳐있는 이 나라에서, 덕후로서의 성장을 수시로 방해하는 척박한 교육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만큼의 덕력을 보여주고 있는 내 딸이 나는 진심으로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