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 기록 탐험: 아날로그 키퍼 스페이스 다이어리
*아날로그 키퍼의 스페이스 다이어를 사용한 방법과 사진은 중간부터 있습니다.
교사가 된 후 한동안은 학교에 있으면 언제나 정신이 없다는 점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교사가 하는 일은 주로 수업, 담임 업무, 행정 업무로 나눌 수 있는데 내 경우에는 그 총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아주 많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 일을 했다 저 일을 했다 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타의에 의해 업무 간 전환을 굉장히 자주 해야 했다는 것이다. 내 일과에 고정된 일정은 아침 조회, 하루에 3개 내지 4개의 수업, 종례 및 청소 지도였다. 그 정도를 고정해 두고 가상의 하루를 구성해 봤다. 표의 내용과 ①~⑧의 설명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상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저보다 한가할 수도 있지만 저보다 훨씬 바쁜 날도 많다.
① 우선 조회를 하고 나서 1교시 수업까지 10분이 남는데 그 사이에 학급 학생들과 상담할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혹은 조회 사항이 많아서 학생 개인의 출결 서류 등을 쉬는 시간에 받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정신없이 교무실에 내려가서 수업할 것을 챙겨 와 1교시 수업을 하러 간다.
② 2교시는 수업이 없어 다음 수업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10분 정도 학습지를 어떻게 만들지 생각을 하다가 담임 나이스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습지 구상을 다 못 끝낸 상태로 나이스 업무를 처리한다. 나이스 업무를 끝내고 다시 학습지 구상을 하려고 했지만 얼마 안 가 2교시가 종료한다.
③ 쉬는 시간까지 수업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학생이 조퇴를 하겠다고 교무실에 온다. 부모님한테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5분 정도 시도해서 연락에 성공한 후, 조퇴증을 써 주고 교실에 올라가 휴대폰을 꺼내 학생을 보내니 이미 3교시 수업이 시작됐다. 급하게 교실로 이동해 수업을 한다.
④ 오늘은 급식 지도가 있는 날이라 4교시에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니 점심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20분 동안 아까 못 끝낸 학습지를 구상하고 편집을 시작하려고 하니 점심시간 3분 전. 급식 지도를 하러 간다.
⑤ 급식 지도를 하고 와서 마저 학습지를 만들까 했는데 부장 선생님이 동아리 업무에 대해서 안내하신다. 동아리 담당 교사들에게 안내할 내용이 있다. 안내할 내용을 정리해 본다.
⑥ 부장 선생님과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동아리 담당 교사들에게 보낼 메시지의 초안을 작성한다. 첨부 파일과 가독성까지 점검하고 나니 5교시가 15분가량 남았다. 부장 선생님이 5교시 수업이 있어 일단 메시지 초안을 부장 선생님께만 보내 놓고 남은 시간에는 학습지를 편집한다.
⑦ 수업을 마치고 온 부장 선생님과 메시지 초안을 상의한다. 수정할 내용이 몇 가지 있어 메모해 두고 쉬는 시간 중엔 수정이 어려울 것 같아서 6교시 수업을 하러 간다.
⑧ 종례와 청소 지도를 마치고 돌아오니 퇴근할 때까지 20분가량 남았다. 학생 조퇴와 결석이 있어서 출결을 처리하고 내일 조회에서 안내할 내용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니 동아리 안내 메시지를 수정하지 못한 것을 깨달아 내일 할 일로 적어 놓는다. 학습지도 시간 날 때마다 편집을 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일단 굉장히 진이 빠질뿐더러 내가 하루종일 무엇을 했나 싶다. 사실은 수업도 하고, 수업 준비도 일부지만 했고, 동아리 안내도 많이 준비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일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많이 드는 데다가 실제로 업무에 소요되는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통으로 하면 1시간이면 끝날 수업 준비도 '아까 어디까지 생각했지? 내가 이 표를 왜 삽입했지?' 등 이전의 흐름과 연결하면서 하려다 보면 1시간 반, 2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4년 차에는 비담임을 한 번 했었는데, 학급 운영과 담임 관련 업무 처리(출결, 나이스, 안내)를 하지 않아도 되니 정신없는 것이 훨씬 나아지기는 했다. 5년 차부터는 다시 담임을 했는데 완급 조절의 요령이 생겼는지 심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는지 업무량이 줄었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여전히 처음 3년에 비하면 훨씬 덜 정신없다. 하지만 내가 오늘 뭘 했지,라고 물었을 때 뚜렷하게 답할 수 없다는 것은 비슷했다.
그래서 올해는 학교에서의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해 보기로 했다. 기록해서 눈으로 보면 나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무 수첩이나 일반적인 다이어리 양식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른 것이 아날로그 키퍼라는 브랜드의 스페이스 다이어리였다.
이 다이어리는 올해 2월 신학년 준비를 위한 출근일부터 10월 8일까지 기록했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정착했던 기록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매주 월요일 또는 출근 첫날에 맨 왼쪽에 수업 교시를 표시한다. 학교에서는 시간의 기준이 수업 시간이기 때문이다. 1교시 시작 시간인 9시 옆에 [1]을 표시하고, 점심시간은 12시 30분부터니까 12시와 1시 사이에 [점]으로 표시했다.
2) 고정된 일정, 예를 들면 수업이나 부장 회의 같은 것을 미리 표시했다. 1학년 1반 수업은 <101>, 부장회의는 <부장회의>와 같이 표시했다.
3) 회의나 학사일정 변동 등은 날짜 쓰는 칸에 빨간색으로 표시해 눈에 잘 띄게 했다. 생활교육위원회는 <생교위>, 진로 체험의 날은 <진로 체험>이라고 표시하는 식이다. 그리고 회의 일정의 경우 시간에 맞게도 미리 기록해 뒀다.
4) 그 외의 칸은 실제 업무를 수행한 후에 기록했는데 행정 업무는 검은색, 수업 관련 업무는 연두색, 생활지도 관련 업무는 남색, 회의 등의 일정이나 갑작스러운 보강처럼 까먹기 쉬운 일정은 빨간색으로 구분해 표시했다. 첫 번째 사진은 색깔 구분을 확실하게 하지 않았고 수련 활동으로 인해 행정 업무가 많아서 검은색이 많은데, 두 번째 사진은 다양한 색깔이 있다. 남색으로 '학생 상담'이라고 써 놓은 부분은 생활지도 업무로 학생 이름이 드러나 모자이크 처리했다. 두 번째 사진의 상담뿐 아니라 첫 번째 사진의 생교위 조치에 따른 '교내봉사'도 남색으로 표시했다.
다음은 매일의 할 일을 기록한 부분이다. □ 표시와 함께 할 일을 쓰고, 일을 마친 후에는 체크했다. 만약 일을 끝내지 못해 미뤄야 하는 상황이면 화살표 표시를 했다. 이 부분만 봐도 그 주를 어떻게 보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수련활동 준비 기간이라 검은색이 많고 모자이크에 숨겨진 내용도 대부분 선생님의 이름인 반면 두 번째 사진은 학생 이름을 모자이크한 것이 많은데 □의 색깔을 보면 알 수 있듯 대부분이 생활지도 관련 업무다. 세 번째 사진처럼 비교적 한가해 월, 화에 써둔 수업 준비에만 집중한 주간도 있었고, 네 번째 사진처럼 연두색(수업 관련)이 많은 주간도 있었다.
이 다이어리를 본다고 내가 일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학생과 상담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상담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수업이나 행정 업무 역시 그 성취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간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업무 과정과 결과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도 아쉽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일을 했다는 것, 제법 성실하게 많이 했다는 것은 확실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 일 했다 저 일했다 정신없게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지만, 그런 날도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보면 '제대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라 '정신없는 상태로 많은 일을 했다'가 진실에 가까운 문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노트는 업무 인수인계용으로도, 내 업적에 대한 포트폴리오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지만 나에게 충분히 수고했다고 말해준다. 어쩌면 노트를 시작하면서 첫 장에 쓴 말과도 조금은 맥이 통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