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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an 29. 2021

걱정 많은 엄마에게 찾아온 아이

아이에게 배우는 세상 - 성장의 기록

© biancamentil, 출처 Pixabay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이 삶을 이끄는 에너지이고, 그래서 힘들지만 놓지 못한다. 삶에 별이라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걱정을 하게 될지 크나큰 피로감이 몰려왔었다. 임신을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전과 달랐다. 걱정은 별이를 품고 있는 동안 상당 부분 경감됐다. 조산위험이나 태교 의무감 같은, 임산부에게 있을법한 걱정 외에 쓸데없는 걱정은 일지 않았다. (물론 서러움은 있었다. 서러움은 걱정과 더불어 내 삶에 들러붙은 기본적 감정이라 그게 문제가 된 건 아니다.) 크고 작은 걱정이 산더미일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임신 출산 육아의 A부터 Z까지 노트 필기하며 차곡차곡 준비했을 나는 태평한 마음으로 유명한 육아서 몇 장을 넘기다 관두고 그냥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스마트폰도 하고 TV도 보고. 말이 없는 성격이라 태담을 활발히 한 것도 아니었다. 임신 기간 중 큰 이벤트도 없었다. 25주 무렵에 위기가 있었으나 무사히 넘겼고 36주 되기 전 조기수축으로 입원했다가 라보파 3일 맞고 나아져서 퇴원. 다음번 수축 때는 분만 진행할 거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출산일이 갑작스럽지는 않겠구나 안도했다. 친정집에서 누워만 있다가 이제 좀 움직여볼까 싶어 조심성 없이 걸어 다니고 놀던 날 저녁, 양수가 터져서 병원행.



분만 방식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출산 공포와 분만 방식 고민이 시작된다는데 난 그렇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하겠다는 생각뿐. 양수가 터지고 출산준비를 할 때에서야 ‘아, 나 자연 분만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초산임에도 진통 5시간 만에 별이는 세상에 나왔다.



별이가 태어나자마자 몇 천배의 두려움과 걱정이 몰려왔다. 부서질 듯이 작아서. 아이를 들어 옮기는 것이 조심스러워 손끝이 떨렸다. 그때 생각했다. 몸속에 함께 있었던 아기가 내 걱정을 지워주었던 거구나. 평소의 나라면 생각지도 못할 태평함과 평온함, 그게 별이 덕이었구나. 아니라면 별이가 세상에 나오고 내가 혼자가 되었을 때 이렇듯 급변할 수는 없는 거였다.



별이는 태평한 아이다. 밤이 되면 자연스럽게 잠들었다. 낮잠도 잘 잤다. 유두혼동도 없었다. 울다가도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바로 그쳤다. 이유식도 거부가 없었다. 브로콜리나 오이 같은 것도 잘 먹었다. 조산아로 태어났지만 금세 상위 n%를 찍었다. 백신 부작용도 없었다.



한마디로 별이는 잘 먹고 잘 잤고 잘 컸다. 많은 엄마들이 힘들어하는 신생아 기질이 거의 없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축복받은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인 상태였다. 정신적으로 늘 힘들고 지쳐있었다. 행복했지만 행복한 걸 몰랐던 거다.



돌 지나고 별이에게 주관과 고집이 생기며 엄마의 역할은 더 힘들어졌지만, 자라는 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가니 걱정이 다시 희석되기 시작한다. 아주 조금씩.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는 축복이다. 천사가 내게 왔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걱정이 많고 인생을 비관하던 나에게, 그 작은 발로 뚜벅뚜벅 찾아와 위로가 되어 주는 태평한 별이, 평온한 별이.





지난 제주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별이가 비행기를 한 시간 정도 잘 탈 수 있을까였다. 아직 두 돌도 안된 별이가 기압 때문에 괴롭다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마땅히 없을 거였다. 물이나 요구르트를 먹이거나 비타민 사탕을 물려주어도 여전히 귀가 욱신거릴 테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을 때, 동굴 같은 입구에서 조금 칭얼거리던 별이는 놀랄 만큼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이착륙 시에는 창문 밖을 유심히 살피기까지 했다. 아기가 놀라지 않게 애착 인형, 조청 과자, 병 요구르트, 뽀로로 영상 등을 잔뜩 챙겨 간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적응했다. 지긋이 창밖을 살피더니 비행 중에는 쿨쿨 잠이 들어버린다. 무던하게 비행을 마치고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다시금 깨닫는다. 아, 별이는 엄마의 걱정을 쿨하게 날려버리는 아이구나. “에이~ 엄마 뭘 그런 걸 갖고 걱정해요. 걱정할 것도 많네요, 참.” 별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능청을 떨지는 않았을까.



별이는 호텔 식당이나 라운지에 있는 음식을 평소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쉴 틈 없이 먹었다. 챙겨 간 쌀과자와 고구마 스낵도 많이 먹었다. 한살림 즉석밥과 김, 소고기/짜장/카레 소스를 종류별로 챙겨 간 것은 짐만 되었다. 아이를 할머니 집에 맡기고 여행 다녀와야 할까 잠시나마 고민하던 시간들이 무색했다. 이렇게나 잘 적응하는데.



오늘도 별이는 8시가 되기 전에 밤잠에 들었다. 편하게 잠이 드니 아기에게도 좋은 일이다. 덕분에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별이에게 감사한 일이 정말 많다. 내가 하는 희생에 꾸준히 보상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늘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걱정이 무색해지는 고요하고 평온한 삶. 별이와 엄마의 삶.


(2019.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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