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으로써 망각할 기회를 얻는 것

정든 것들과 이별하기 –비움의 기록 –별이의 주차타워 장난감을 보내주다

by 선작
© charlesdeluvio, 출처 Unsplash



아이의 탄생은 단순히 가족 구성원이 한 명 더 늘어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미성숙한 부부에게 끝도 없는 책임은 물론,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끈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지구상의 수많은 엄마들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첫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얼마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하는 깊고도 끝없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아이를 키우며 쫓기는 듯한 일상을 살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남들이 다 한다는 것들, 그러나 실상 필수는 아닌 것들에 매달려 날마다 마감일을 치르는 것 같았다. 몸 상태도 엉망이었다. 이런 상태와 감정을 알아주지 못하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산후우울증을 겪는 동안 별이 아빠는 별 도움을 주지 못 했다.




별이의 고모와는 매년 생일 때마다 상품권 선물을 주고받는다. 반년 정도 텀을 두고 상품권을 주고 받으니 사실 플러스 마이너스 0인 상황이지만 서로를 기억하고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곤 했다. 대면도 전화도 없이 간단한 메시지만 적어 모바일로 보내는 선물은 시누와 올케 사이라는 다소 어려운 관계에 적당히 스며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해에도 별이 고모는 내게 상품권을 보냈다. 그다음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꼭 나를 위해 쓰겠노라 다짐했건만 대체 뭔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마법의 날짜인 산후 백일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백일이 지나도 돌이 지나도 이 우울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다는 죄로 이러한 감정을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막막했다.




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세상에 눈을 뜨면서부터 제일 자주 간 장소는 대형 마트다. 형형색색의 물건들이 코너마다 진열되어 있고 맛있는 간식이나 장난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별이는 마트 가자는 말을 무척이나 반겼다. 집 앞 마트에서부터 차를 타야 갈 수 있는 초대형 마트까지 거의 매주 주말마다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별이가 좋아하는 것은 주로 과자와 아이스크림, 그리고 자동차 장난감이었다.




그 날은 별이가 4층짜리 주차타워 장난감과 그에 딸린 열다섯 개의 미니 자동차에 관심을 보였다. 별이 방은 이미 포화 상태라 그 정도 크기의 새 장난감을 들이려면 거실에 늘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별이 아빠는 별 고민 않고 그 큰 상자를 카트에 담고 있었다. 출산 이후부터 계속해서 깊어져 왔던 별이 아빠와의 골이 바닥을 치던 때였으니 이 장난감을 우리 집에 들이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봤자 내 말을 결코 듣지 않으리라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저 기분 내서 몇 시간 동안 놀아주고 좋은 아빠가 되는 이와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가르쳐야 하는 엄마 된 이는 출발선 자체가 다른 법이다. 아이에게 물어뜯기는 기분을 자주 느끼는 동안, 아이 아빠는 일이 끝나도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주차타워 장난감을 계산대에 올리는 순간. 왜 그랬을까. 아이 고모가 준 그 상품권이 생각났다. 장난감을 사는 것은 예상치 않은 소비였고 이것을 관리하는 것이 내 몫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다면 보너스로 얻은 이 선물을 지금쯤 쓰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온전히 나를 위해 쓰자 생각했던 그것으로 말없이 계산을 마치고 장난감과 같이 산 몇 개의 식료품을 카트에 담아 푸트코트로 향했다. 먹고 싶던 치킨을 주문했다.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다녀오니, 치킨 조각은 두어 개를 남겨놓고 모두 별이 아빠 뱃속으로 직진한 후였다. ‘이 집은 치킨을 왜 이렇게 박하게 주냐, 몇 입 먹으니까 끝이네.’ 하며 너스레라도 떨어주길 바랐으나 아이 아빠는 배를 채웠으니 볼일 끝났다는 듯 주차타워에 딸린 미니 자동차로 별이와 놀아주기 시작했다.




문득 나를 위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쏟던 시간, 나를 위한 소비, 나를 향한 애정과 관심은 더는 없었다. 엄살은 허용되지 않았다. 온갖 신경이 아이의 안전과 성장을 위해 곤두서 있는 것 같은 하루하루가 아이 아빠에게는 유난 떠는 어떤 여자에게 몹시 괴롭힘당하던 나날들이라 했다. 별이를 위한 고생이라면 달게 받겠으나 그래도 인정받고 싶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어. 당신 덕에 별이가 잘 크네. 그러나 그것 또한 내게 허용되지 않았다. 괴롭힘 또는 유난으로 표현하던 시간을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며, 그 사람은 ‘너를 믿어 맡긴다던’ 금융 관련 인증서를 모두 회수해 갔다.







별이가 자라며 주는 기쁨이 점차 커졌고 엄마가 다치면 와서 호호 불어줄 줄 아는 귀여운 어린이로 성장하며 나의 공허는 점차 채워졌다. 밑 빠진 독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별이에게 받는 것이다. 거실 한편에서 위엄을 뽐내던 주차타워 장난감은 금세 별이의 관심 밖으로 밀려 나갔다. 조그마한 부품들이 어딘가로 사라져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더니 이후에는 스펀지와 스티커로 된 장식품이 별이 손에 의해 찢겨 나갔다. 장난감으로써의 역할을 못 할 지경이 되자, 별이가 어린이집에서 분양받아 온 달팽이 집을 놓는 거치대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 별이 고모와 사촌 형이 물려 준 장난감 오토바이와 각종 미니카가 담긴 상자까지 거실에 들어오자, 이제 주차타워는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을 열 때마다 발에 걸리는 아주 성가신 존재로.




“별아, 있잖아. 이거 버려도 돼?”

“왜?”



별이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우선 별이가 이제는 갖고 놀지 않고, 문 열 때마다 엄마 발에 걸려. 그리고 이 주차타워를 보면 엄마가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이 생각나.”



별이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허락한다.



“그래! 버리자!”



장난감을 분해하느라 낑낑대는 동안 별이는 신이 났다. 뭔가를 부수고 해체하는 모습이 주는 쾌감이 있는 법이다. 종이상자에 들어갈 만큼 작은 단위로 해체한 후 플라스틱 분리수거장으로 보낸다. 이 장난감을 사던 그 순간을 – 심지어 무슨 수단으로 값을 냈는지까지 –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므로, 사라짐으로써 관련된 모든 것을 망각할 소중한 기회를 얻은 이도 나뿐이었다.



© juja_han, 출처 Unsplash



향이 좋다는 원두를 사서 커피를 내리고, 음질 좋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아이에게 간식을 사 줄 때 내가 먹을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는 것이 이제야 찾는 나를 위한 시간이자 소비다. 이런 시간이 잔잔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걸 이전엔 몰랐다. 세상 모든 것은 흔하지 않을 때 비로소 소중해진다는 걸 배운다. 자신을 위한 장난감이 즐비한 환경에서 사는 별이는 당연히도 이런 것이 소중한 줄 모른다. 덕분에 그 장난감을 보낼 수 있었으니 다행인지도. 잘 가라.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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