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된 자가 마주 잡은 손

정든 것들과 이별하기 - 비움의 기록 - 물려받은 물건들을 정리하다

by 선작



photo-1549465220-1a8b9238cd48.jpg?type=w1 © shekatherine, 출처 Unsplash



깨끗한 박스 안에 비닐이나 종이를 깔아 마감 처리를 한 번 하고 그 안에 위생팩에 종류별로 넣어 꼼꼼하게 포장한 택배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인터넷 쇼핑을 수도 없이 하지만 이렇게 깔끔히 마감 처리한 택배 포장을 본 적이 없다. 주기적으로 집으로 배달되어 오던 진희 언니의 택배다. 나보다 네 살 위 사촌 언니이며 서로 살아온 방향이나 시간이 조금씩 달라 친밀감이 적던 관계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게 자라는 동안 언니와 함께한 기억은 거의 없다. 진희 언니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귀여운 딸을 얻어 사랑으로 키우고 있었는데 조카의 돌잔치에 가서 요란스러운 축하 송을 들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카는 별이보다 삼 년 먼저 태어났고 그 무렵 나는 양가 친지와 직장 동료까지 북적거리는 돌잔치가 아무래도 성향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정신없이 돌잔치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는 도중에 사촌 언니들끼리 육아용품과 어린이 교구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었다.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언니가 그다음 차례의 언니에게 쓸 만한 것들을 물려 준다는 약속이었다. 아름다운 물자 순환에 대하여 잠시 생각했으나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곧 잊었다. 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그 서클의 바깥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별이를 낳았다. 지치고 힘들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나를 같은 길을 이미 걸었던 언니들이 온전하게 이해하며 보듬어 주었다. 반갑고 감동적인 위로였다. 응원 메시지와 달콤한 케이크 쿠폰이 자주 전송됐다.




- 많이 힘들지? 지금 한창 힘들 땐데. 젖몸살은 없어? 아기가 잠은 잘 자?




그들의 위로는 적절한 타이밍에 배달됐고 정확히 그 시기에 필요한 말과 조언을 담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다 지나갈 일이니, 지치지 말고, 엄마 밥 잘 챙겨 먹고, 조금 더 기쁘게 해 보자. 그들이 남긴 단어들을 기우면 그런 말이 됐다. 1년 남짓 함께 한 직장 동료도, 인터넷 상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만난 익명의 누군가도 그랬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구원이 됐다. 겪어 낸 시간의 무게를 아는 사람들이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아름다워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아름다운 물자 순환의 서클 속으로 편입됐다. 진희 언니는 본인이 직접 사서 조카에게 입혔을 깨끗한 옷들과 그 위의 언니로부터 받았을 장난감들을 모아 적당한 시기에 택배로 부쳐 줬다. 잠시 잊고 있다가 또 한 상자씩. 아이가 한 철씩 입을 수 있는 새 옷도 사서 함께 보내주었는데,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찾아 입힐 만큼 예뻤다. 내가 직접 고르는 것보다 훨씬 더 예쁜 아이템들을 쏙쏙 찾아 선물해 주는 것을 보며 역시 경력은 무시할 수 없다 싶었다. 조카가 쓰던 작은 모자와 스카프, 양말도 몇 세트씩이나 배달됐다. 하나씩 신겨보려 했지만 별이는 생각보다 빨리 자라서, 결국 택배로 도착한 모습 그대로 옷장에 한 철 동안 넣어두어야 했다. 빳빳한 상태로 옷장에 든 옷가지들이 한 짐이었다. 열어보지도 못한 채 물려받던 날 포장 그대로 남은, 시기 지난 장난감도 여럿이었다.




진희 언니가 물려 준 옷과 장난감을 정리한다. 아쉽게도 나 다음에는 이 바통을 이어받을 사람이 아직 없어 친척 간 물자 순환 서클은 잠정 휴업이다. 대신 필요한 아기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기대하며 관련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우리의 서클이 넓어지는 것을 상상했다. 이 원이 퍼지고 퍼져 나가 세상의 모든 엄마 된 자가 손을 이어서 맞잡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자들이 만든 아름다운 원.




진희 언니에게 배운 것은 받는 사람이 쓰기 좋은 형태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포장하는 법. 택배 상자가 찌그러지지 않게 사방에 탄탄하게 박스테이프를 붙이는 것과 동봉한 쪽지에 엄마 이름 석 자를 다정하게 적어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게 해 주는 것.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자란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러나 그걸 일깨울 힘조차 없이 지쳐 있는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




배운 대로 적기로 한다. 우리, 힘내요. 다 지나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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