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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l 20. 2021

집에 가고 싶다

학교와 학교 - 책상 위 낙서

 나는 학교가 좋았다. 극심한 시험 스트레스로 교실 문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눈물을 흘리던 몇 개월과 함께 진급한 유일한 친구와 마음이 맞지 않아 점심 같이 먹을 친구를 홀로 탐색하던 외로운 반년을 제외하면 나는 줄곧 학교를 좋아했다. 하란 거 잘하고 하지 말란 거 안 하는 평범하고 성실한 모범생이었기에 선생님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그 탓에 내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생님들도 아주 많았으나 일 년간 성실히 보필(?)했던 담임선생님들에게만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 그런 학생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같은 교복과 같은 머리 모양을 한 평범한 여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색깔도 향기도 없는 모범생 그 자체였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내가 재미없는 학생인 것과는 별개로 학교는 내게 즐거운 공간이었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크고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하루의 패턴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고마운 공간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 참 부럽지 않아요? 아침에 학교만 오면, 국어 수학 가르쳐 주고 음악하고 미술도 가르쳐주고…. 거기다가 찌뿌둥할 즈음이면 체육도 시켜주잖아요. 아, 밥도 맛있게 해 주고!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교사가 된 첫해 만난 A 선생님께 나는 그렇게 말을 건넸었다. 나와는 여러모로 결이 달랐던 그녀와 내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좁은 교무실을 함께 쓰는 동료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흠 잡히고 싶지 않았던 새내기 교사로서 나는 함께 있는 누구에게나 생글생글 잘해 주려 노력하던 참이었고, A 선생님은 그런 나를 기꺼이 받아 주던 사람이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결이 다른 사람과 그렇게 가까워지는 경험도 가능케 하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네? 무슨 그런 말을…. 선생님, 애들 얼마나 감옥 같고 힘들겠어요. 나는 죽어도 다시 안 돌아갈 거예요.”      



 A 선생님은 특유의 시원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서 꺼내놓은 나의 진심 어린 감상이 와장창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 그런가요? 하긴 학교가 답답한 아이들 많겠지요.”     



 이어가 봐야 별 의미 없는 감상 나눔은 그렇게 마무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나의 머쓱함이 금세 사라질 수 있을테니.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이미지가 하나가 떠올랐다. 학교를 감옥에 비유하고 졸업을 석방일로 표현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속으로 무척 의아했던 기억이다. 50분 단위로 이어지는 일과가 답답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감옥으로까지 표현될 일인가. 틀에 박힌 일상이 그토록 못 견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나온 사람들이 지나온 시간을 모험으로 묘사하고 자신을 역경을 견딘 인물로 창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감옥이나 지옥 같은, 십 년이 넘게 이어지는 고단한 모험이었으리.

 





 넘치는 에너지로 교내의 모든 일에 앞장섰던 민재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집약된 에너지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승부 근성이 있어 무엇이든 시도해 보는 아이였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2년 내내 학생자치회 임원으로 교문 선도를 도맡아 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늦지 않고 제 몫을 다 했다. 학생들은 보통 여덟 시부터 학교에 오기 시작하는데 그전에 드문드문 등교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겠다고 일찍부터 나와 교문을 지키는 날도 있었다. 학창 시절의 나를 민재 옆에 세워 둔다면 저 넘치는 기운을 견딜 수 없어 그의 무대에서 슬그머니 퇴장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의 나를 세워놔도 마찬가지일 거다. 민재의 어머니는 무척 차분하고 섬세한 분이셨는데 아이를 볼 때마다 걱정되는 바를 이렇게 밝히셨다.



 “선생님, 우리 애는 학교를 너무 좋아해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선도 서야 한다고 나가고 수행평가 준비하느라고 늦게까지 깨어 있고 그래요. 얘가 키 더 커야 하는데…. 아침잠 좀 많이 자야 하는데 말이에요.”   

  


 ...... 민재도 민재의 어머니도 보통 분이 아니었다.      


    

 주연이는 민재를 만난 다음 해였던가, 그다음 해에 알게 된 학생이다. 주연이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여 줄곧 혼자 다녔으며 친구들이 자신에게 관심 두는 것을 싫어했다. 당연히 학교를 좋아할 리 없었고 결석이 잦았다. 학교가 맞지 않는 옷이란 것을 인정한 학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나 지원은 생각 외로 많다. 본인이 정규 교육과정을 떠나고 싶다면 대안학교나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얻을 수 있다. 반 친구들은 주연이를 독특하다고 생각했지만,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아이에게 싫어할 빌미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그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느끼고 대했다. 주연이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 했다. 정말 그랬다. 선생님에서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주연이를 돕고 싶어 했다. 끝까지 동굴에서 나오기를 거부한 주연이는 학업중단 위기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제도를 잘 이용하여 (담임선생님의 공이 컸다) 간신히 졸업했고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소식을 모른다.      

    


 아주 극단적인 두 사례를 가까이서 보고 나니,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이들에게도 개인 체험은 모두 다르게 생성됨을 천천히 알게 된다. 누군가는 친구가 싫어서, 수업이 싫어서, 또 누군가는 집단에서 자신이 이루는 성취가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그렇게 이곳에서 울고 웃으며 적응한다. 긍정적인 경험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증폭되고, 반대의 경험은 그 방향대로 쌓여 간다. 단 한 번의 성공 경험이나 상처나 흔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고.





같은 말을 빼곡하게 적어 놓은 책상 위 낙서


 교실을 정리하다 발견한 낙서는 주인의 마음을 넘치도록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답답하고 싫었기에 같은 말을 반복해서 가득히 적었을까. 무슨 교과 시간에 적어 내려간 내용일까, 혹시 친구 문제로 고민을 겪고 있나, 거듭 물음표를 그려보다가 낙서의 주인에게 이렇게 쓰기로 한다. 친구야, 너에게도 학교가 그렇게나 힘든 공간이니. 한 편으로는 네게 위안이 되는 공간이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 봤어. 집에조차 가기 싫은 친구들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테니까. (굳이 이런 생각을 떠올린 건 이름 모를 네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였어) 어느 오후에, 점심을 잔뜩 먹고 식곤증에 취한 네가 잠을 깨려고 거듭 끄적인 말이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나는 사실 학교를 참 좋아했는데, 그 사실을 지나고 나서야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됐거든. 네게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 다음 시간에 보자.   




※글에 쓰인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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