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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Sep 22. 2021

너희 선배다 ♡착한 선배♡

학교와 학교 - 학교 근처 놀이터에서 발견한 낙서

 학생회장 은재는 애교 섞인 말투로 항상 웃으며 말하는 누구라도 사랑할 법한 아이였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밝은 아이였으며, 당연히 교문 선도에도 적극적이었다. 전교생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은재에게 큰 기쁨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선도할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멈춰 세워서 두꺼운 패딩 안에 교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었는지, 치마는 단 박음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 하나하나 점검하는 눈길이 매서웠다. “학생!” 또는 “친구!” 하고 다정한 척 불러놓고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학생회장의 모습은 위엄 그 자체였다.



 한 번은 학생자치회의 아이디어로 하굣길에 선물을 나누어주는 깜짝 이벤트를 진행했다. 교문 선도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외양과 편하게 슬렁슬렁 교문 밖을 향하는 하굣길의 외양은 딴판이다. 아침에 입고 온 펑퍼짐한 교복 치마를 타이트한 여벌 치마로 바꾸어 입은 학생, 사복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오는 학생, 민낯이 풀메이크업으로 바뀐 학생 등 다양하다.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나누어 주던 학생회장 은재의 얼굴이 굳더니, 내게 황급히 묻는다.


 “선생님, 얘네들 다 잡아야 하죠?”


 그건 질문이 아니라 이제부터 행동을 개시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학생! 실내화 신고 하교하면 벌점이야! 야! 너 치마 단 박으면 안 된다고! 너 이름 뭐야?”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선도는 진행되고 있었다. 학생들 벌점을 기록하는 명렬표가 학생회실에 있던 터라 그걸 핑계 삼아 넘어가 보려 했으나, 이미 은재는 휴대폰 메모장을 켜고 꼼꼼하게 아이들의 이름을 사유와 함께 적고 있다. 선물이 있는 즐거운 하굣길이 목표였던 이벤트는 단숨에 대대적인 복장 선도의 현장이 됐다. 급기야 학생들이 일렬로 서서 하교하기에 이른다. 은재는 거기에 나와 있는 모든 교사보다 더 강렬한 존재였다.



 당시 1학년 아이 중에는 유난히 튀는 무리가 있었다. 졸업한 학교에서부터 ‘주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온 인물들이었고, 서로를 알아보는 눈이라도 있었던 건지 그 아이들끼리 단단한 무리를 결속하여 함께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이 무리를 두려워했다. 괜히 눈 밖에 났다가 1년 동안 고생할 일이 뻔하니 알아서 피하는 쪽이었다. 이 무리 또한 프리한 하굣길을 즐기며 교문을 향해 가고 있던 차였다. 아이들은 전문가 못지않은 눈 화장으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연예인들조차 쉬이 쓰지 못할 요란한 컬러를 다양하게 사용했다) 밖에서 만났다면 우리 학교 학생인지 전혀 몰랐을 거다. 바로 이 무리가 은재의 레이더에 걸렸다.


 “야! 1학년!”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동이 걸렸다. 짧은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이거 싸움 나면 어쩌지.’


 1학년 무리도 1학년 무리였거니와, 은재도 은재였다. 불꽃 튀는 무언가가 생길 거로 예상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네? 저희요?”


 교정이 울리도록 깔깔거리며 서로 팔짱을 끼고 내려오던 무리의 눈이 갑자기 온순하게 휘둥그레진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래, 너희! 교내에서 진한 화장 하면 안 되는 거 몰라? 치마 단 박은 것도 내일까지 풀어 와! 학번 하고 이름 불러.”


 은재는 휴대폰 메모장에다가 아이들의 이름을 적기 시작한다. 무리는 한 줄로 서서 한 명씩 자기의 학번과 이름을 읊은 다음 한 명씩 교문 밖으로 퇴장한다. 처음 보는 풍경이다. 이토록 질서 잡힌 모습이라니.


 아이들이 모두 귀가한 후, 남은 이벤트 선물들을 챙기며 은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은재야. 1학년들은 선배가 제일 무서운가 보다. 네 앞에서 꼼짝도 못 하네.”


 선생님들 말은 결코 안 듣는 아이들인데….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은재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뭐, 저희도 저 때 그랬는데요.”






 그렇다. 우리 때도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의 등쌀에 밀려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미술에 조예가 전혀 없던 나에게 수행평가가 있는 교과로서의 미술은 큰 벽처럼 느껴졌었다. 어떻게 해도 수습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는 한 달 만이라도 좋으니 기본 스킬 좀 배워 오라고 미술학원에 나를 등록시켰다.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주류였던 학원이었기에 나보다 선배인 원생은 몇 없었다. 중학생 언니 한 명, 그리고 또 기억나지 않는 누구 한 명. 이름이나 자세한 프로필까진 모르나 얼굴만은 익숙한 관계들이 생겼다.



 데생을 가르쳐 주던 대학생 언니는 내가 편해질수록 실없는 농담을 잘 던졌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사람에게서 알맹이 없는 농담을 듣는 것이 불편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늘 침묵을 택하는 편이었다. 하고 싶은 말도 섞고 싶은 말도 없었다. 기본 기술만 배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했으니 되도록 빨리 배우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학원에서 자주 보았던 중학생 언니는 나만큼이나 말이 없었다. 반듯한 칼 단발을 하고 컬러가 들어 있는 안경을 쓴 언니였다. 늘 깨끗한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왔다. 언니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정해진 과제를 그려낸 다음 조용히 인사하고 가는 사람이었다. 저 언니도 나만큼이나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가 보다. 나처럼 엄마 때문에 억지로 여기 다니는 걸까? 단발머리를 한 걸 보니 중학생인 것 같은데 어느 학교에 다닐까? 이 단지 안에 살까? 대학생 언니보다 이 언니가 더 편하게 느껴졌다. 수다쟁이보다는 과묵한 사람이 더 좋았으니까.


 “얘는 주혜원이야.”


 대학생 언니가 모처럼 둘을 소개해 주었을 때도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 너무 딱딱해 보일 것 같고, ‘안녕?’이라고 말하면 너무 건방져 보일 것 같아 어떤 반응도 하지 못 한 채 멀뚱 거릴 뿐이었다. 얘네는 다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대학생 언니가 웃었다.      



 그렇게 몇 달을 다니던 미술학원을 정리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참 만에 나는 학교에서 유명하다는 문제 학생의 이름을 학생주임이던 기술 선생님의 입에서 듣게 된다.


 주혜원.


 학교 복도에서 지나치듯 본 주혜원은 딱 떨어지는 칼 단발에 컬러가 들어간 안경을 쓰고 교복 치마를 발목까지 늘여 힙합 스타일로 입고 있었다. 혜원 언니는 복도 바닥에 침을 잘 뱉었다. 기술 선생님은 이 언니의 이름을 발음할 때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과 말투를 했다. 저 언니가 왜요? 어떤 사람인데요? 몇 번이고 묻고 싶었으나, 우리는 그저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알 뿐인, 옆에 이젤 몇 개를 두고 나란히 앉아 석고소묘나 풍경수채화를 그대로 따라 그리던 그 정도 사이였을 뿐이므로, 그럴 수 없었다.



 그해 같은 반이었던 안나는 한참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의 소녀였고 2, 3학년 무서운 선배들과의 접점을 조금씩 만들어 가던 참이었다. 안나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너라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담임선생님의 청을 받은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말 잘 듣는 모범생 티를 지울 수 없는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은 전혀 멋지지 않았기에 안나는 슬슬 나를 멀리했다. 선생님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를 거부한 쪽은 안나였고, 그 아이는 내가 짝사랑했던 오빠와 사귀며 보란 듯 나를 밀쳐냈다.



 안나는 어느 흐린 날, 학교 뒤 사람 인적이 드문 곳에 불려 나갔다. 안나를 부른 사람들은 위 학년 선배 언니들이었다. 평소의 통통 튀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공손하게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은 45도 아래로 내려뜨린 안나를 데리고 가던 선배 중에는 주혜원 언니가 있다고 했다. 이런 일에는 항상 그 언니가 낀다는 말은 기술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안나는 그날 이후 한동안 무릎 쪽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다녔다. 아이들은 수군댔다.


 - 최안나가 주혜원에게 밟혔다더라.


 나는 안나도 혜원 언니도 무서웠다. 위 학년 언니들이 무리 지어 복도를 지나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고작 한 살이나 두 살 많을 뿐인 그들이 뿜어내는 독한 기운들이 무서웠고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무서웠냐고 묻는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랬었고, 그래야만 했던 나날이었다. 강아지처럼 귀엽게 웃던 안나가 급속도로 변해버린 시기와 말없이 그림만 그리다 자리를 뜨던 혜원 언니가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기에 나는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대로 수줍어하며 조용히 살아갈 것이고, 저들은 저들대로 과감하고 강하게, 가끔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선배는 이유 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도 되나요?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은재와 혜원 언니는 다른 사람이지만, 특정 상하관계 속에 있을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에서 같은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어려운 존재로 남아 있는 선배, 연장자라는 존재에게 그 힘을 쥐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 연장자를 깍듯이 대하라. 그가 네게 어떤 사람이건 간에.


 학창 시절을 무난하게 보내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어지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했으나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 문장은 부지런히 나를 쫓아오곤 했다. 다행히 시간은 그럭저럭 흘러갔으나…. 결혼 후 지금까지 시가족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내게 아직도 괴로운 문제로 남아 있다. 사회 속에서 규정된 압박적인 상하관계 안에서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지레 위축되는 일이 잦다. 왜 이런 일들이 세대를 건너 다른 양상과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뿌리 깊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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