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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Sep 26. 2021

붙잡을 것 없는 노년의 슬픔


지난 3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빠르게 일상을 회복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예전과 다름없이 잘 드시고 외출했다 돌아오며 이것저것 사 오는 것도 그대로였다.



올 초 겨울, 할머니의 요양병원행을 선택하고 아빠 아래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 즉 나의 삼촌들과 고모가 할아버지를 큰형님댁에서 나오게 해서 따로 모셔야 하는 것 아니냐 이야기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늘 그랬듯 말만 무성했을 뿐 그 누구도 자기가 해결하겠다 나서지 않았다. 큰소리치던 사촌언니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해결하겠노라고 큰소리치던 사촌언니의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 노인부양에 지친 큰올케가 갑자기 모두 놓고 떠나버리면 어쩌냐는 질문에 고모는 '언니는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도, 할아버지의 끈질긴 노후는 여전히 나의 엄마에게 자연스럽게 떠넘겨져 있다. 성질 고약하고 제멋대로인 늙은 남자를 그 누가 거두고 싶어 하겠는가. 아빠와 삼촌들, 고모, 그리고 엄마의 동서들은 살아남아있는 할아버지의 거취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할아버지는 엄마의 연금과 아빠 명의의 집에 의탁한 채 스러져 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땅을 팔았다. 진작부터 처분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왔다 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70 먹은 남자와 가끔 온전한 정신을 벗어나는 90 먹은 남자가 법무사와 끙끙거리며 토지 문제를 처리했다. 젊은 눈이 한 둘이라도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내가 지척에 살고 있음에도 엄마는 선을 그었다. 결국 두 노인이 그 땅을 팔고 세금을 내고 그 과정을 도맡아 했다.



땅을 처분한 돈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한바탕 설왕설래가 있었다 한다. 엄마는 통제광답게, "나라면 손주들에게 용돈 조로 얼마씩 나누어 줄 것이다."라고 흘렸다. 아빠는 그 말을 따랐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설득했고 나와 별이는 각각 정성껏 이름이 적힌 봉투를 하나씩 받았다. 이사비용에 보탬이 될 것 같아 좋았다. 전달받은 날 바로 가까운 은행에 달려 가 입금했다. 그 후로는 도배 일정과 청소 일정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한참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추석에 잠시 할아버지를 뵈었는데도 나는 그 돈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할 생각이 안 났다. 기본적으로 아이 아빠를 보면 잔뜩 굳어서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엄마 앞에서 내가 냉정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날도 쏜살같이 식사만 하고 집에 왔고, 어제서야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 너 할아버지께 전화했냐?

- 할아버지? 왜요?

- 봉투 안 받았어?

- 아... 엄마한테 받았어요. 전달받았어요.

- 그랬겠지. 받았겠지. 근데 전화도 한 통 안 해?



아차 싶었다. 돈을 당연스레 받고 아무런 감사 표시도 하지 않은 것에 할아버지는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온전히 내 잘못이었다.



- 아... 내가 까먹었어요. 다음에 별이랑 집에 가서 꼭 할게요.

- 손주들이 한 놈도 감사하다는 말 없이 입을 싹 씻었다더라고. 나 원 참...

- 아, 걔네는 원래 그런 애들이잖아. 어휴, 나쁜 놈들...



그 나쁜 놈들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울적했다.




바로 다음 날, 오전 일찍 별이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 엄마 집을 향했다. 근처에 있는 큰 떡집에서 선물용 떡이라도 사 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영업을 하지 않는 일요일이었다. 크게 건물을 돌아가려는데 크리스피크림도넛 가게가 보였다. 거기에서 12개 들이 도넛세트를 샀다. 한 손에 짐을 들고 한 손에 크리스피 상자를 들고 별이에게는 내 점퍼 끄트머리를 잡고 따라오라고 한 다음 횡단보도를 건넜다.



- 별아, 왕할아버지 보면 어떻게 말하기로 했지?

- 왕할아버지, 션물이에요~

- 응, 그다음에는?

- 왕할아버지, 용돈 감사해에요!



똑똑한 별이는 연습한 대로 잘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안방 문(아직도 할아버지가 집에서 제일 큰 방의 주인이다)을 열고 선물을 건넸다.



- 할아버지, 용돈 감사드려요. 이사비용에 보탤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할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세상에 붙잡을 것 하나 없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베푼 호의에 모두가 침묵했다는 것은 그분께 어떤 뜻으로 읽혔을까. 누구에게도 중요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셨을까. 이미 몇 년 전부터 나와 동생, 엄마, 아빠를 제외한 모든 친척들은 할아버지를 그렇게 대하고 있었는데.



장남으로 태어난 죄로, 결혼을 잘못 한 죄로, 평생을 할아버지의 고집과 호통을 받아내야만 했던 아빠와 엄마 대신, 손주와 다른 아들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주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의 선택을 떠올려 본다. 몇십 년을 희생해도 그들의 희생은 가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구나 싶어 울적했다. 평생을 남 좋은 일만 한 아빠와 엄마를 보면서 그들과 비슷한 압력으로 나 또한 분노와 증오가 피부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끼지만, 별 다른 수가 없다.



할머니는 세상에 붙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아버지 또한 그걸 깨우치고 홀연히 떠나게 되실 거다.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 삶과 죽음을 모두 겪는 생명들이 모두 그러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그 절대 고독에 몸부림치면서도, 사실은 이 상태가 모든 생명의 종착역이라는 걸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소천을 겪고 나서부터였다.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 있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존재들을 곁에 두고 잠시간 잊으며 이것저것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 믿게 됐다. 엄마와 아빠는 아주 오래전,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의 찰나의 순간에, 그런 삶 -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부양의 굴레와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그저 받아들이며 사는 방식의 삶 - 을 끌어안기로 결심했을 터이며 그렇기에 선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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