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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Sep 30. 2021

나의 어린 술친구

성장의 기록 - 아이를 키우며 배우는 세상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맛있지 않은데 마셔야 하는 것, 마시고 나면 속이 쓰라린 것, 흐트러진 모습으로 영차영차 해야만 분위기를 깨지 않는 것, 모든 과정이 영 맞지 않았다. 술 마시고 위경련을 심하게 앓았다는 핑계를 방패 삼아 술 없이 술자리를 버티는 날이 많았다. 꼭 수녀같이 사는 사람이라며 비꼬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 말에 타격감이 없었던 이유는 첫째로 수녀 같은 모습이 대체 뭐가 나쁜 건지 몰라서였고, 둘째는 원치 않는 자리에서 몸을 상하게 할 만큼의 의미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작 불편한 술자리가 매개일 뿐인 관계는 언제 놓아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왁자지껄한 친목 모임에서 자주 이탈했다.     



 

 그랬던 나였다. 출산한 후, 몸은 회복되었으나 육아의 고됨에서는 해방되지 못했던 날. 아니, 언제 해방될지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행군이 이어지던 날에 나는 맥주를 한 캔 두 캔 따기 시작했다. 아기가 잠들면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갈 수 있는 가까운 편의점에서 만원에 맥주 네 캔을 팔았다. 신생아를 재우고 아이 아빠가 퇴근하기까지 남은 몇 시간, TV나 인터넷을 훑어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맥주 생각이 났다. 습관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한 캔을 쉼 없이 들이키면 몸이 노곤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전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 한없이 자유로웠던 그때로.


 아이가 잠든 시간을 틈타 겨우 즐길 수 있는 취미는 음주와 야식이다. 신생아 엄마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취미, 말로만 듣던 그것이 내게도 생겼다. 함께 할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았고 그럴 누군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이와의 연결고리를 잠시 내려놓고 해방감을 즐기며 그렇게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육아 퇴근 후 음주의 장점은 신체를 이완시켜 준다는 것이다. 온종일 아기를 안고 어른 나는 마지막으로 그날 쓴 젖병을 닦고 삶는 데에 남은 체력을 소진한다. 온종일 긴장 상태로 있었기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다. 그럴 때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캔을 따고 꼴깍꼴깍 들이키고 나면 예상되는 시점에서 온몸이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찾아온다. 발끝이 노곤노곤 녹으며 얼큰한 기분도 올라온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같은 속도로 녹는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종일 고군분투하던 내 자아가 깊은 잠에 빠짐과 동시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허술한 자아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음식 쓰레기를 비워야 하는데. 내일 하지, 뭐. 이유식 재료 다듬어야 하는데. 그냥 사 먹이지, 뭐. 우리 아가는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지? 하는 식이다.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승모근에 올라탄 모든 의무를 잠시 내려놓고 나는 꽤 근사한 기분으로 실컷 TV도 보고 책도 봤다. 그 순간만큼은 무척 행복했다. 내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아주 좋은 공기와 질감으로 찾아왔다. 술이 깨기까지 몇 시간 동안 나는 그런 자유 속을 유영했다.


 술은 일탈감과도 맞닿아 있다. 술을 진탕 마셔 나를 망가뜨려 보겠다는 어설픈 치기는 내가 음주에 빠진 이유 중 하나였다. 아이를 낳고부터 시작됐던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지?’라는 질문은 도통 그 답을 찾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아이 아빠를 그런 사람으로 선택했기에 이 시간이 고통과 슬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입 밖으로 내면 모든 신뢰와 심리적 안전망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아 고통스러웠던 나는 결국 다른 방식을 택하게 된다. 별이 엄마가 망가지는 모습을 실컷 보아라. 분리수거함에 쌓여 가는 맥주캔을 보며 아이 아빠는 혀를 끌끌 찼다. 어쩌려고 그러냐고, 좀 줄이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살이 쪄도, 건강을 해쳐도, 나아가 큰 병에 걸려 세상을 뜨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떠날 사람은 아무래도 괜찮은 법이다. 문제는 남는 사람들이니까. 넌 그렇게 잘났으니 나 없이도 별이를 잘 키우겠지, 이상하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우울 증상이었다.


 위기가 왔다. 하루가 갈수록 우울감은 깊어지고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는 종종 놀이 매트 위에서 노는 별이를 마주 보는 방향에 안주를 차려두고 술을 마셨는데, 깨어 있는 아이와 함께 있을 때도 알딸딸하게 취해 있어야 더 적극적인 놀이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죄책감을 압도했다.


 “엄마, 캬~!”


 별이는 어른 흉내를 곧잘 냈다. 아이는 자기 컵에 담긴 액체가 우유든 물이든 가리지 않고 짠하고 부딪히는 흉내 놀이에 빠져 있었다.


 “에이, 캬 소리를 왜 내는 거야.”

 “이건 엄마도 하고 할머니도 해!”


 믹스 커피를 타서 오랜 시간 캬- 소리를 내며 마시는 별이 할머니 이야기였다. 며칠 시부모님 댁에 다녀오면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습관을 그대로 복사해오는 별이였다. 가시처럼 거슬리던 여러 습관들 – 내 것이 아닌 – 이 그저 웃겼다. 알코올의 힘이었다. 안주도 점점 기름져 갔다. 식사를 대신하는 안주로 컵라면이나 파인트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영양 공급을 제대로 해 줄 리 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씹어 넘기며, 다른 종류의 포만감을 얻었다. 그 무렵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경신했다. 몸은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출산 후 복원되지 못한 배가 살로 굳어 몸에 맞는 옷이 없었다. 위장 건강은 말할 필요도 없고, 피부도 푸석푸석. 날이 갈수록 더욱 피곤해졌고 자기계발이나 건강과 같은 멋진 단어들이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별이가 좋아하는 마트에 갔던 어느 주말이었다. 카트 아이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마트의 물건들을 구경하던 별이가 별안간 소리친다.


 “이거 엄마 먹는 거야! 이거 사야 돼, 아빠.”


 아이 아빠를 다급히 불러 세운 별이는 손가락으로 컵라면이 수북이 쌓여 있는 매대를 가리켰다. 아이 아빠가 무심한 눈으로 내 쪽을 보고 별이를 보다가, 그냥 가자며 카트를 끌어갔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매일 이런 것들이 나의 허기를 달래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 앞에서 당당한가?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는가? 사실은 이 상황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은 건 아닌가? 별이가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것들을 ‘엄마가 먹는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이제 더는 스스로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저항 없이 추락할 수는 없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잖아. 더 나은 삶, 능력을 발휘하는 하루, 가치 있게 여기던 것들에 대한 열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아직도 그때의 나에게 감사한다. 스스로를 수렁에서 건져 낸 그 위대한 구원에 대해서. 구원은 스스로 하는 거였다. 별이가 날 도왔다.     




 운동을 시작하며 데일리 루틴이던 음주는 서서히 내 삶에서 퇴장하기 시작한다. 직장에 있을 때는 내 몫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이를 하원 시킨 후에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그리고 늦은 시간 조금이나마 생기는 빈틈에는 차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몸과 마음을 이완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건강을 볼모로 시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지?’라는 피 토하는 심정을 별이가 위로해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생의 결과가 별이의 눈부신 성장이라면 기꺼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아이 아빠는 그 성장의 곁길에 있는 사람으로 아무래도 내 삶에서는 별이만큼의 중요도가 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음주는 이제 진정한 ‘취미’가 됐다. 습관처럼 하던 것이 사라지니 이제는 정말 기분이 얼큰하게 좋을 때 생각나는 정도의 의미가 되었다. 직장에서 유난히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서도, 별이 때문에 일주일 치 체력을 끌어다 써야 할 때도 술 생각은 그다지 나지 않는다. 반면, 별빛을 받으며 수목원 같은 아파트 단지 내를 운동하듯 산책하듯 돌고 들어오던 어떤 날에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이 문득 생각났다. 근사한 풍경과 유쾌한 기분을 고조시켜 줄 어떤 것이. 늘 가던 편의점에서 과일 맛 나는 맥주와 새우깡을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멋진 영상을 재생해 줄 아이패드까지 준비했다. 오랜만에 풍류를 즐겨볼까! 혼자 마시려는데 별이가 새우깡 봉지를 보고 내게 다가온다.


 “엄마, 엄마! 나도 과자 먹을 거야.”


 아이는 새우깡 몇 개를 우적 거리며 먹더니 자기도 물을 마시겠다고 한다. 캐릭터 컵에 물을 담아 주니, 그걸 맥주캔에 부딪히며 소리 낸다.


 “짠!”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별이와 엄마는 좋아하는 가수 공연 영상을 틀어놓고 주거니 받거니 새우깡을 먹었다. 둘은 까르르 웃고 기분이 내키면 끌어안고 토닥토닥했다.



 

 술자리를 즐기지 않고 술 자체는 더욱 즐기지 않던 나였기에 ‘술친구’라는 존재가 전혀 없었었다. 별이를 낳고 자기 파괴적인 음주를 시작했고, 별이의 도움으로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었다. 사회초년생 시절 술이 대체 무슨 의미이길래 이런 의미 없는 섭취를 거듭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나는 별이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 의미를 새로 배울 수 있었다. 꼭 같은 액체를 목으로 넘기지 않아도, 술을 매개로 웃고 떠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술친구라면 별이는 나의 가장 어린 그리고 최초의 술친구가 되어 줬다. 너를 낳고서 엄마는 술의 매력을 알게 된 것 같아. 좋은 쪽, 나쁜 쪽 둘 다로 말이야. 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엄마와 진짜 술잔을 나눌 수 있는 때가 오면 나는 얼마만큼 변해 있을까. 아무래도 더 좋은 쪽이었으면 좋겠다. ⓒsunj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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