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처리가 남아 관련된 분들께 협조를 구했다. 우연히도 모두 나보다 한참 어린 연배의 동료들이었다. 이제껏 여러 90년대생을 만나봤지만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특징을 직접 겪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무더기로 만난 작년 이후로 나는 이 말을 꽤 자주 하게 될 것 같다. 이 사람들, 규정이나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꽤 독특한 편이다. 편견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쿠션어 범벅
2년 차 A는 업무를 자기 편한 대로 처리한다. 초기 업무분장으로 계획된 몫이 100이라고 한다면 명석한 두뇌로 그것의 50프로만 자기가 할 수 있게 판을 다시 짠다. 사실 누군들 그렇게 못 하겠나 싶지만 나는 겸연쩍어서 저렇게 하지는 못 하겠던데... 어쨌든 '쟤 농땡이 친다'라는 느낌을 감출 의지도 없는 것 같다. 당연한 수순으로 나는 A에게 신뢰가 없어 더 가깝게 지내지 않고 딱 나와 연관된 일까지만 도와준다. 매뉴얼 찾아 주는 정도로만. 내년에도 후년에도 A와 함께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그것을 고칠 생각도 없는 자에게 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B는 연말에 나와 협업 건이 하나 있던 사람이다. 관련자 총 3명에게 일정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루 전 미리 안내하고 개인적으로도 연락을 취했다. C는 카톡의 1이 사라짐과 동시에 바로 일을 처리했고 D는 n시까지 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답신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협업'을 해 준 사람들이다. 반면, B는 개인전화와 대표전화로 번갈아 간 연락을 받지 않고(추측으로는 수신거절 누른 것 같음) 내용을 알리는 긴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나는 오후 늦게까지 B의 업무처리를 기다리다 안 되겠다 싶어 퇴근했다. 이 일을 들은 관리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전에 긴급 업무 처리에 있어서도 연락을 받지 않아 큰일 날 뻔한 일이 있었다 했다. 전화를 두 개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직장에 알린 번호로는 연락을 받지 않는 일이 잦다고 한다. 업무폰 만드는 거야 누가 뭐라 하나. 그러나 미리 알린 건에 있어서도 이렇게 대처하는 건 진짜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업무에 엮인 사람이 몇 명인데 한 번은 못 받았다 쳐도 무슨 일인지 문자 확인했으면 콜백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한밤중이 다 되어 B의 문자가 왔고 겨우 연락 닿은 김에 일 처리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할 일을 알려 주었다. 다음 날 내용 오류가 발견되어 다시 전화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더 이상 내가 이 사람 전화 대기조 역할을 할 수 없어서, 오류에 대한 수정 사항을 세세하게 써서 보냈다. 그리고 끝. 난 더 이상 신경 안 쓸란다.
2.
지난주, 작은 공사를 앞두고 바로 아랫집에는 직접 알려야지 싶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방화문이 닫혀 있고 그 옆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어 발 디딜 곳을 찾으며 문고리를 동시에 찾아야 했다. 계단 인근을 창고처럼 쓰고 있는 집이었다. 방화문을 열려고 보니 잠겨 있다. 이거 짐 쌓아 놓으면 불법일 텐데... 물건을 치우라는 관리사무소의 안내문도 붙어 있었으나 그 종이 앞으로 높게 쌓여 있는 짐들에서 '깔끔한 무시'의 태도가 엿보였다. 다시 계단으로 올라 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층을 내려갔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안에서 강아지가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문이 닫혀 있는데도 좀 공포스러웠다. 왈왈 대는 소리를 한참 들으며 기다려도 인적이 없어 다시 올라왔다. 심하게 짖는 개를 키우는구나... 그날 저녁에 아이 아빠가 내려 가 양해를 구하니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떤 여자아이가 나와서 동의서에 사인하고 들어갔다고 했다. 대학생과 부모님이 함께 사는 가족 구성인가 보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싶던 차 바로 어제 그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로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손잡이 (별이 키 높이 정도이니 1미터가 넘는 정도에 달려 있는 손잡이다) 위로 발을 뻗어 걸치고 운동화 끈을 묶기 시작했다. 다리를 쫙 찢어 걸친 상태로 말이다. 뒤에 있던 나는 당황했다. 당사자는 당당했다. 양쪽 끈을 그 포즈로 묶고 나서 그녀는 유유히 사라졌다. 여럿이 쓰는 엘리베이터 손잡이와 벽에 발자국을 남기며 끈 묶기라니... 잠긴 방화문 옆 벽 중간까지 쌓아 놓은 짐, 낮동안 집에 홀로 갇혀 있는 크게 짖는 강아지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촉이 발동하며 결론이 났다. 엮이지 말자. 엮일 일을 결코 만들지 말자. 이사 후로 직접 인사 한 번 드리지 못하여 과일상자 하나 들고 내려가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거금을 들여 산 4cm짜리 자이언트 매트를 사는 동안 걷지 않겠다. 별아, 얼른 자라렴.
3.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을 싫어했었다. 괜한 편견으로 벽을 쌓는 말 같았고 아무래도 고리타분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거꾸로 내가 그런 시선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특정 모습으로 너를 판단할 것이니 내 앞에서 조심하라는 권위적인 태도도 느껴졌고 그래서 문자 그대로 꼰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속담은 타인을 평가하고자 만든 말이라기보다는 '촉'이라는 이름을 지닌 빅데이터로부터 송출되는 신호를 빠르게 캐치하라는 인생 금언 같은 것이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관계에 쏟기에 내 시간은 유한하다. 감정이나 체력은 별이와 나 자신에게 쓰기에도 모자라다. 그러니 조절해야 한다. 빅데이터를 근거 삼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