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관심사가 방향성이 짐작되는 신작이다. 신경증에 시달리는 서술자와 그녀의 친구인 인선과 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며, 더 정확히는 제주 4.3 사건으로 스러져 간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의 어느 시점을 소설로 풀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지극히 세태적인 소설을 붙잡고 살아가다 보니 이런 전개가 조금 고루해 보인 것도 사실이다. 허나,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세상에 소리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소년이 온다』에 이어 이 또한 세상에 사료의 느낌으로 남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눈은 인선이 사고를 당하던 날 내렸고, 인선의 어머니가 언니와 함께 가족의 주검을 찾을 때도 내렸으며, 인선의 부탁을 받은 '나'가 제주 중산간으로 향하던 날에도 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를 은폐하고 덮어 온통 새하얗게 만들어주는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데 '나'는 눈송이의 핵이 되는 먼지와 따스한 표면에 닿아 순식간에 증발하는 눈의 이미지에 더 집중하는 듯하다. 눈을 쓸어내야만 알 수 있었던 진실을 찾기 위해 여생의 힘을 가득 짜내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인선의 어머니처럼 말이다.
인선의 새는 결국 죽었고 '나'와 인선의 생사는 알 수 없다. 소설 전체에 등장하는 수 없는 죽음에 이 두 사람의 목숨이 더해진들 무슨 의미겠는가. '나'는 인선 어머니의 역사를 끌어안았고 동시에 같은 배경을 가진 모든 이들의 삶을 끌어안았다. '나'가 작가 자신이라면, 그걸 끌어안은 데에서 그치지 않고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책으로 써 내려 가 내 앞에 던져 놓았다. 그것을 나와 사람들이 읽는다. 모두에게 인선 어머니의 삶이 전달된다.
친한 언니 중에 제주가 고향인 사람이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던 중 언니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차를 타고 관광을 하다 4.3 기념관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하던가. 정작 언니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응, 우리 동네는 비슷한 시기에 제사가 많아. 담담한 말투로 언니는 말했다. 기념관의 분위기는 흡사 무거운 공기에 휩싸인 듯했는데 그것이 혼령들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시험 준비를 하며 줄곧 읽어댔던 오래된 소설들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현기영을 비롯한 글 속의 삼춘들. 내게는 화염의 열 때문에 펑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던 고추장 독과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 간 일가족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이 뇌리 곳곳에 새겨져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이라도 써야만 했을 거다.
내게는 한강 연배의 한국 작가들의 문체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이 있다. 경외심이라고 쓰긴 했지만 별로 좋아하는 문체는 아니다. 반복하고 자꾸 곱씹게 하고 불친절하기에 가끔 읽히기 위한 글보다는 쓰기 위한 글에 가깝지 않나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두운 부분들을 서술하기에 더 어울리는 문체일지도 모르겠다. 기쁘게 읽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이런 글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들도 차츰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 귀한 것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