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Feb 05. 2022

성장을 위한 파괴와 불가해 不可解

[독서기록] 『최선의 삶』 임솔아


작가가 청소년기에 겪은 일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야기이며, 그러므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구 상에 단 한 명 임솔아뿐이다. 수년간 이어져 온 악몽 때문에 그걸 거듭 쓸 수밖에 없었다는 작가 인터뷰가 실려 있다. 악몽이 뜻하는 바가 말 그대로 수면 상태의 그것인지 아니면 반복 재생되는 경험인지 명확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추측건대 후자라는 데에 한 표 던진다.     


절친한 친구 강이, 소영, 아람이 함께 가출한다. 친구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도둑질, 사기,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일을 저지르며 시간을 보낸다. 하필이면 그들은 ‘여중생’들이라서 익명의 남자들로부터 성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도리어 자신들의 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세 친구가 방황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아간 이후, 소영은 원하는 것을 거머쥐기 위해서 폭력을 도구 삼는 행동을 거듭한다. 주변 무리는 차츰 소영에게 복종한다. 여러 뒤틀린 감정선 끝에 강이와 소영이 피비린내 나는 주먹싸움을 하게 되는데, 승리는 소영에게 돌아가고 그들은 남남이 되었으며 강이는 아람과 둘이 다시 가출한다. 둘은 비키니 바의 종업원으로 가출 생활을 이어가고 결국엔 이들 또한 분열한다. 서로를 향하는 지속적인 폭력 끝에 너덜너덜해진 강이가 내린 결론은 모두가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는 것이었다.     


여자 중학생이 등장하는 소설은 대개 심리적 암투를 소재 중 하나로 등장시킨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묘하게 따돌리며 한 사람을 말려 죽이는 방향의 폭력이다. 『최선의 삶』에는 이러한 감정적 폭력 이외에도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상대방의 피를 보는 신체적 폭력 장면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주인공이 중학생으로 설정되었을 뿐 인간이 서로에게 가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폭력이 다 등장한다. 글을 잘 쓰는 작가가 늘 마음에 품고 있던 경험을 오래 다듬으며 전개했기에 그것이 조금 덜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강이가 느끼는 감정과 자기 정의를 다 걷어내면 폭력, 폭력, 폭력의 연속이다. 동성 친구들끼리 행하는 편 가름의 폭력,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더 강한 자 앞에 무릎을 꿇리는 폭력, 어른 남성이 청소년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학교 밖의 여성이 무딘 어른들에게 가하는 폭력, 딸이 부모에게 가하는 폭력, 부모가 딸에게 가하는 폭력, 믿었던 친구를 배신하는 폭력…. 흡인력 있는 소설이라 하루 만에 다 읽었지만, 피로가 상당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심사평대로 여기에 적힌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나 또한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     


이들의 성장 방식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 서로에게 견디기 힘든 폭력을 저지르며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방향에서 자꾸 이탈하려고 한다. 나의 청소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이들이 왜 자꾸 가출하고 서로를 공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왜 이러는지’를 알고 싶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묘사되는 인물인 아람을 제외하고는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며 살아가는 이유를 소설 속에서 찾기가 힘들다. 강이는 진학을 위해 위장전입까지 불사하는 부모님 아래 자란 아이고, 소영의 부모님은 강이네보다 더 관심도 자원도 많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대체로 휘청거리는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의 근원에는 가정불화가 있기 마련인데, 강이와 소영의 방황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이런 성장 과정이 더 잘 맞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 난 정말 알고 싶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너희는 이렇게나 치열하게 자신을 파괴하며 살았니? 욕구나 치기에 휘말려 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자 했니? 작가가 악몽이라고 축약한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마도 원인일 테다.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이 있는 법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택처럼 말이다.      


소설에 묘사된 성적인 장면들 때문에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았다는 작가 인터뷰 내용을 먼저 듣고 이 책을 읽었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을 밝히고 출판하였으니 세간의 관심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도 짐작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읽어 보니, 가출한 친구 셋이 무어라 할 냉철한 판단도 없이 익명의 남자들과 몸을 섞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행동을 하는 그 모든 장면에서 포르노적인 시선을 단 한 순간도 느낄 수 없었다. 담담하고 빠르게 서술되어 집 떠난 청소년들이 겪는 천태만상 중 하나를 제시했다 정도로 생각될 뿐이지 여기에 호기심이 일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작가가 여성 작가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일부 작가들의 작품을 패스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 장면을 묘사하느라 주객이 전도되는 전개를 종종 봐 왔다. ‘쓰다가 신나셨구먼’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최선의 삶』에는 보호망을 벗어난 사회적 약자에게 닥치는 것들, 당연한 절차처럼 그들에게 뻗치는 마수가 현실 그대로 건조하게 그려져 있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더 그럴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사람만이 관조할 수 있는 법이라고,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위에도 잠시 언급했는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심사평도 아주 인상적으로 내게 남았다. 이 책은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인데, 과연 ‘대학소설’이라는 구분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고찰로부터 나름의 결론에 이르는 부분이다. 정리하자면 문학은 기교가 아닌 인생에 있으며, 세월의 상처가 문학에 깊이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혼돈의 청소년기를 갓 지나온 이들이 기억하는 상처의 깊이와 그것을 종이 위에 토해내는 자리는 아무래도 좀 다른 구분이 될 것 같다.      


나는 진작에 청소년기를 지나왔으나 해소되지 못한 그때의 응어리는 나의 인격이 되었다. 무게에 익숙해졌다 뿐이지 절대 가벼워지진 않는다. 이 상태로 청소년을 자주 접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종종 그들에게서 동족 의식을 느낀다.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에게 시선이 가게 된다. 그러므로 내 시선의 초점은 강이, 아람, 소영과는 다른 방향에 서 있는 아이들을 향한다. 나와 강이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짐승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 다른 방식으로 치열한 삶을 사는 아이들을 보듬는다. 그래서 내가 쓰게 될 글은 그쪽일 확률이 높다. 불가해한 이들에게 던지는 의문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공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문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힘든 책을 읽었다. ✅

작가의 이전글 그 삶이 던져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