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별 것 아닌 선의』이소영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이었다. 사회생활을 했다 한들 때 타며 자리를 지키려 애쓸 필요 없는 일을 했고 독립에는 별 관심이 없어 공단 지역에 발령받아 근무한 1년을 제외하고는 쭉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내 시간을 자유로이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소박한 것들에 닿을 수 있으면 되는 정도, 욕망하는 범위는 딱 그 정도였다. 자유나 소유에 대한 욕망과 안정에 대한 욕망 중 더 큰 것은 후자 쪽이어서 대체로 조용히 걸어가는 편을 택했다. 나를 이루는 것들을 틈틈이 채워가며 느린 걸음으로 살아가는 삶이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성실함이었다. 매일매일을 잔잔하고 성실하게 일구어 나가는 것, 편법 쓰지 않고 정직하게 걷는 것, 그것이 부모님이 내게 준 자산이었다. 별 탈 없이 서른이 넘어서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이 복이라면 복일까. 출산과 동시에 안정된 보금자리에 대한 욕망이 커졌고 그때쯤 미친 듯이 집값이 오르고 있었으며 이대로 살 수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 빠른 것, 쟁취하는 것, 이기는 것에 대한 이슈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성실과 정직이 내가 배운 것의 전부였으나 이것은 더는 무기가 되지 못했다. 성실은 굼뜬 것, 정직은 바보 같은 것.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이것이 교과서에서나 보던 ‘아노미’인가.
착함보다는 늦됨에 가까웠다. 잇속에 대한 빠른 판단이 되지 않는 것뿐이었다.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으니 늘 한 발자국씩 늦었고, 손해로 이어졌다. 내 머리가 그쪽이랑 안 맞는가 보다 생각할 밖에는. 왜 차분히 앉아서 필기를 못 하느냐고, 왜 백번을 가르쳐줘도 또 틀리냐고 격분하던 나에게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쪽 머리가 아닌가 봐요. 죽어도 안 맞는 게 있나 봐요.” 그게 하필이면 이 사회가 열광하는 덕목들과 일치하지 않으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분명한 것은 느리게 갈 때 내가 훨씬 편하고 안정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게 좀 싫었다.
신생아를 키울 때 내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던 지점은 똑같은 일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야 한다는 거였다. 먹이고 기저귀 치우고 젖병 닦고, 이유식 만들고 치우고 재우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반복되는 노동 말이다. 직장에서는 조금씩 변주가 있는 사건이 벌어지고 적절한 스트레스와 함께 일 처리를 끝내고 나면 자족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육아는 아니었다. 내가 육아와는 통 맞지 않는다고 느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성과가 한 번에 보이지 않는 강도 높은 노역을 매일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맘때쯤 늘 했던 말은, “별아, 얼른 커라. 얼른 커라….”
그 터널을 지나오며 느낀 것은 매일매일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아이가 자라왔다는 것이고 그 시간이 점점이 쌓여 지금이 됐다는 것이다. 하찮게 보였던 것들이 차곡차곡 모여 큰 것을 이루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퇴근하고 하원 시키고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를 세트로 무한 반복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이것이 전혀 하찮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물론 너무 힘들어서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될 때도 많다….) 언젠가 훌쩍 커 버린 청소년 별이를 보며 퇴근 후 한 세트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또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느리고 선하고 아름다웠다. 점묘화 같았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크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것을 내내 상상했다.
『별 것 아닌 선의』는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무슨 이유에선지 울고 있었고, 성당에 기도하러 가기 위해 택시를 잡는다. 눈물 흘리는 승객을 본 택시 기사는 그때까지 듣던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에서 ‘아베마리아’가 흘러나오는 클래식 FM으로 주파수를 바꾼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설피 울었는지 작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택시에서의 경험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위로가 되는」에서 아이 잃은 부모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인 롤빵을 자꾸만 권하던 빵장수의 일화가 인용된다.
모두가 같은 결이었다. 매일 성실하고 조용하게 하루를 쌓아왔던 나의 지난날과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성장해 온 별이, 사소하고 서툴지만 작은 선의를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주 느릿느릿 걸어가지만, 자신의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받는다고 생각하는 작가 이소영의 이야기. 이소영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별 것 아닌 선의’들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 세상이 더 따뜻해지리라는 믿음이 매 페이지마다 꾹꾹 담겨 있었다. 선한 사람의 선한 이야기를 보는 것이 어찌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내가 살아온 삶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책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만난 하찮은 사람들 - 원래 값보다 비싸게 출장비를 부른 설치기사, 잘못된 정보를 줘 놓고 뻔뻔하게 굴던 부동산 중개인, 더 멀리는 ‘지들이 돈 없어서 대출받는 주제에 왜 나한테 뭘 해 달라고 하냐’며 폭언하던 임대인 - 이 내 마음속에 심어 무럭무럭 자라게 한 어두운 것들을 천천히 해독해 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아무래도 선한 사람들에게 더 끌린다. 그래서 이 시대의 아노미에서 벗어날 수가 없나 보다.
작가는 스스로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 그것이 진짜인지 겸손인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이 분은 세상에서 ‘좋고 따뜻하고 착한 것’만을 골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살아가며 만나는 많은 사건 중 어떻게 좋은 일만 있겠는가. 과거는 기억이며 내가 기억하는 것이 내가 지나온 길이 된다. 작가는 좋은 선생님, 좋은 동료들, 좋은 제자들, 좋은 카페 주인, 좋은 신부님,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글을 썼다. 따스한 글을 남겨 기억하는 행위는 작가의 삶에 선한 기운을 순환시키는 심장 역할을 하게 될 거다. 이것을 출판하여 온기를 나누어 준 것도 너무 감사하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을 때 귀엽고 몽글몽글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떠올랐다. 『별 것 아닌 선의』를 읽을 때도 온몸에 따스한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고 아름다운 길을 기꺼이 함께 걸어가는 동지를 만난 것 같아 행복했다. 우연히도 두 작가의 이름은 똑같이 ‘소영’이다. (나와 돌림자도 같다!) 추운 겨울 햇살 드는 오후에 함께 노곤하게 녹아들어 갈 수 있었던 정말 소중한 경험을 했다.
필사에 목숨 걸던 시절을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정말 좋은 구절이 너무 많아 안 써 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들을 남긴다.
사경을 헤매던 꼬마를 두 번째로 방문한 신부는 이번엔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꼭 잡아준다. 그새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닌 듯했다. 가정방문 직전에도 남몰래 미사용 포도주를 허겁지겁 들이켜지 않았던가. 여전히 그는 부끄러운 손을 가졌으며, 여전히 모녀는 그에게서 신의 손길을 기대했다. 하지만 어떠랴,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 이렇게 한심하고 불완전한 존재로도 누군가에겐 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 그건 그가 자기 한계를 알면서도 사제의 길을 계속 걸어가게끔 하는 동인이 되었으리라. (69)
그럼에도 왜 그 하나의 기억에 이제껏 매여 있었을까. 혹시 스스로를 위한 변명 아니었을까. 예전에 그랬었다고, 이번에 또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이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미래의 일을 질투하고 과거의 업을 따라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상흔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자기 연민의 고치를 만들어 거기 숨고자 기억을 붙잡고 되새김질했던 셈이다. (150)
살아 있는 토끼풀을 보며 ‘약한 척해놓고 참말로 그악스러운 생존 본능을 가졌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건강히 거기 있어 그걸로 좋았다. 대견하고, 좋았다. 그악스럽게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 역시 서로에 대해 그러리라. 그렇게 믿으려 한다. 약한 척하더니 생명력 하나는 끝내준다며 함부로 냉소하는 대신 안도의 숨을 내쉴 거라고 말이다. 바닥에 머리 처박고 울던 그대가 스르르 다시 고개를 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대견하다며 햇볕 같은 웃음을 그대 위로 쪼여줄 것이다. (217)
그렇지만 난 믿는다. 생의 스위치를 내리고 싶을 만큼 힘들 때는 – 스톤 박사를 찾아온 맷의 환영과 환청처럼 – 그 시기를 넘길 힘과 위로가 내면에서든 외부에서든 우리에게 주어질 것임을. 여행을 계속하다 마침내 두 발 닿게 될 그곳이 지상이기를. 단단한 땅을 딛고 선 그대와 내가 “감사해요”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33)
필사 노트에 적은 ‘이 책의 한 구절’은 마지막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