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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13. 2022

명명과 구분, 자유에 관하여

[독서노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모든 이야기는 내 마음의 필터를 거쳐 소화된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이다. 구독하는 유튜버(겨울서점)의 인스타그램에서 작년 말인가 [강력추천]한다는 글과 함께 이 책 이미지가 올라왔었다. 마침 도서관에 어떤 희망도서를 신청할까 고민하던 때였다. 내용이 궁금해서 바로 이 책의 구매희망신청서를 작성했다. 몇 주가 지나 희망도서를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무렵, 그 유튜버는 콘텐츠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책을 다시 한번 홍보했다.    

  

완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어떻게 이런 책을 이렇게 우연히 또 만나게 됐지?’였다. 여러 책으로부터 답을 얻고자 고군분투하던 터였으므로 익숙한 주제였으나, 한편으로는 내가 모든 책을 그런 식으로 읽어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을 던져 주든 나는 그런 메시지를 자주 얻을 것이라는 생각. 내 마음의 고유한 렌즈 같은 것을 통해 책이나 사람이나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연초마다 다짐해 왔던 ‘늦어도 nn살부터는 반드시 이제까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 말 거야.’가 비로소 구체화되고 있다는 생각.     




책의 전반부는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문이 서술된다.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 시절을 거쳐 자기만의 세계를 일군 위대한 어류학자로 성장한 조던의 발자취를 좇던 작가 룰루 밀러는 마침내 그의 업적 뒤에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 알게 된다. 조던이 일생을 바쳐서 하던 연구 작업은 ‘물고기에게 이름을 붙이고 구분을 짓는 것’이었다. 1906년 봄, 조던이 일평생 거쳐 해 왔던 작업은 난데없이 닥친 지진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다. 물고기 표본이 담겨 있던 병과 병에 붙여 놓은 이름표가 온통 다 섞여 버린 것이다. 조던은 보관용 에탄올이 도착할 때까지 비늘이 마르지 않도록 물고기 표본에 장시간 물을 뿌리고, 뒤죽박죽된 이름표의 주인을 찾아 물고기 살갗 위에 직접 실로 꿰매며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다. 책의 앞부분에서 이 일화는 자기 분야에 올곧은 고집을 가진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시됐으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변한다. 전기문으로 시작하여 룰루 밀러 자신의 철학 에세이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책이다.      


이전에 『진리의 발견』(마리아 포포바)을 읽으면서 이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쓰는 전기문은 왜 이렇게 산만하게 느껴지는지 의문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작가의 관심사와 목적에 따라 역사적 사실은 ‘조립’되기 때문에 탐구 과정을 상세히 적어나가다 보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만약 작가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책을 썼다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좀 다른 성격의 책이 되었을 것 같다. 잘 정돈되었지만, 흥미는 없는 그런 책 말이다. 작가의 영민함으로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 됐다. 자신이 롤모델로 삼고자 한 인물의 민낯을 파헤쳐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고 삶에 영향을 준 다른 인물들도 교차하며 등장한다. 요약하자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목적을 위해 자기기만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자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한 인물이었다.     


우생학의 기본 뿌리는 구분에 있다. A와 not A를 구분 짓는 것에서부터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가 시작됐다. 우생학을 근거로 하여 미국에서는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수용소에 가두어 불임화 수술을 강제하는 일이 있었다. 룰루 밀러는 수용소에 끌려 가 수술을 받은 인물 애나를 만나 인터뷰하고 그 지옥을 겪고 나서도 일상과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냐는 룰루의 질문에는 자주 죽음을 생각하는 자 특유의 우울이 묻어 있었다. 어떤 지독한 계기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세상을 등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깊은 우울을 업고 사는 자들의 습성일 테다. 애나의 답은 함께 사는 메리에게 있었다. 메리는 수용소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동료로 이 둘은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으며 버틸 힘을 서로 주고받는 관계였다. 룰루 밀러는 ‘부적격자’라는 라벨이 붙은 사람, 몸담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서로에게 살아갈 의지와 생의 의미를 일구어 나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라벨이란, 명명이란 무엇인가. 조던이 일평생을 바쳐서 해나갔던 작업,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같은 종류의 것들을 묶어 분류하며 선 너머의 것들을 배척하던 그 모든 작업은.     


그래서 이것은 명명命名과 구분에 관한 책이다. 생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하면 ‘어류’라는 구분은 없다. 폐어(肺魚)라는 생물은 내부 장기의 특성상 연어보다는 소와 가깝다. 이 책의 제목은 엄밀히는 ‘물고기’ 보다는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가깝다. 세상에 물고기라는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룰루 밀러는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오랜 시간 바라 왔던 일 – 작고 가냘픔을 도구로 하여 더 힘이 센 존재에게 보호받으며 사는 삶 –을 놓고 한동안 그녀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곱슬머리 남자와의 재회를 포기한다. 대신, 양성애자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며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간다. 작고 억세며 잡초로 취급되는 민들레는 다른 관점에서는 효능을 가진 약초, 또는 곤충들의 쉼터가 된다. 부적격자로 분류되어 세상에 유전자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판정을 받은 애나는 지옥 이후의 삶을 지옥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천천히 밝은 것들로 채색해 간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할 수 없다 한다. 자연은 혼돈 그 자체이며 인간이 부여하는 질서는 창조의 산물일 뿐이다. 자연의 힘 – 지진 – 앞에 맥없이 부서진 명명의 흔적들을 고집스럽게 꿰매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몸부림은 어느 학자의 숭고한 연구 정신으로 추앙받았을지 모르나, 애초에 그런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의 나무에 드러난 위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저것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할 수 없다. 질서와 구분은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것에 사람이 매여 있지 않는다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름과 구분과 위계를 넘어 선 자유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자유에 관한 책이라고 다시 쓴다.      




여러 지기들과 『사피엔스』(유발 하라리)를 함께 읽을 때의 여운을 생각해 본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상상력에 있다는 것을 활자로 처음 확인한 순간 느껴지던 전율이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이후 사실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모두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아마도 내게는 ‘상상이 만들어 내는 허구와 그 허구가 지탱하는 세상’이라는 렌즈가 생긴 것일 테고 그래서 그 책은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조금 바꾸어 주었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에 애써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사회라는 고정된 틀에 묶인 몸은 맘껏 자유로울 수 없더라도,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그 렌즈, 필터, 또는 관점이나 인생관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같은 색으로 맞아 들어가는 책들을 만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랬다. ✅           



[사족] 

이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마케팅을 잘 한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서두에 네 페이지나 할애하여 실어놓은 것을 보고 놀랐다. 보통 책 표지나 띠지에 있을 법한 찬사들이 가득했다. “이 책은 좋은 책이야! 많은 사람이 칭찬했어! 이제 네 차례야!” 이런 강요를 하는 듯한 구성이라 어색했다. 제목도 문학적인 느낌이 나도록 번역한 것이 주효했다고 본다. Fish를 어류로 번역했다면 이런 느낌이 안 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업계TOP유튜버가 구체적인 책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스포 없이 먼저 읽어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올렸던 것도 포함해 본다. 현재 이 책은 각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다. (자신의 영향력을 알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이미 알고 있으려나?) 좋은 책임은 확실하나 ‘그 정도라고…?’라는 생각이 들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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