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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15. 2022

졸업선물을 준비하며

별님일기, 일_일기



© blickpixel, 출처 Pixabay


청탁금지법이 아니라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뭔가를 받는 건 심한 부담이 된다.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뭔가 부탁을 받는 느낌이 들고 아이를 한 번 더 봐 달라는 메시지 같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 오묘한 기류 속에 있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교직 첫 해, 학년말에 우리 반 혜윤(가명)이 어머니께서 맛있는 떡 선물 세트를 준 적이 있다. 그 안에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청탁금지법이란 것도 없었고 학년말에 주는 선물은 말 그대로 감사의 표시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상품권의 액수가 너무 많아서 정말로 고민됐다.


그때 떠오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과의 일이다. 직장 일 때문에 바빴던 엄마는 내가 반장을 해도 부반장을 해도 다른 엄마들처럼 챙겨주지 못했었는데,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던 것 같다. 상담을 간 날에 엄마는 롤케이크 상자에 현금을 조금 넣어 드렸다.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가 선생님이 엄마께 전해드리라고 건네 준 서류봉투 뭉치를 몰래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봉해져 있지 않은 서류봉투를 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케이크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들어 있던 것들에서 엄마가 벌인 일을 알았다. 나는 엄마께 짜증을 냈다. 엄마가 남에게 봉투를 받았을 때는 불쾌하다 했으면서 왜 엄마는 그런 일을 하냐고. 나는 선생님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모범생이었는데 엄마가 뭘 부탁하고 미안해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엄마는 "그게 아냐. 너도 커서 엄마 되어 봐라."라고 한 마디 했다.


혜윤이에게 방과 후에 잠시 남아 학급 관련된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하고, 혜윤이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를 썼다. '떡 세트는 선생님들과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그리고 혜윤이에 대한 칭찬(진심으로 참하고 똑똑한 아이였다)을 덧붙였다. 집에 가져가서 사인을 받아와야 한다고 둘러대며 혜윤이가 필기한 종이를 봉투에 담고, 편지와 상품권을 넣어 풀로 단단히 봉한 후에 전달했다. 완벽한 대처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혜윤이 어머니께 전화가 왔고, 부담스럽게 해 드린 것 같다며 1년 간 잘 돌봐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 외에는 없었다고 도리어 사과를 하셨다. 선물 준 사람도 거절한 사람도 불편해지는 결과였다. 혜윤이 어머니와의 통화로부터 혜윤이 또한 상품권의 존재를 파악했다는 걸 알았다. 봉투를 단단히 봉해서 보냈지만 혜윤이는 그걸 열어봤던 것이다. 그러니까, 봉투가 봉해져 있건 그렇지 않았건 '엄마께 바로 전해 드려라.'라는 말과 함께 손에 쥐어진 것은 열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다.




별이 어린이집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샀다. 매년 준비했던 것이지만 올해는 뭔가 더 힘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름 무리했다. 자칭 프리미엄 브랜드라고 부르는 화장품 세트를 포장하고 있노라니 나는 이걸 언제 써 봤더라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내 몫으로 쓰라면 굳이 그 가격에 쓰지 않는 것들을 선물로는 척척 사는 내 모습에 익숙하다. 선물은 원래 그렇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알뜰살뜰한 생활필수품 위주의 선물을 받는 것도 물론 좋지만(일단 선물이란 게 다 좋지만) 평소라면 내 손으로 사지 않을 것을 선물 받을 때의 기분은 배가 되는 것 같다.


어, 근데 이상하다. 내가 싫어했던, 이해할 수 없었던, 불편해하던 그 순간을 내가 준비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진짜 아닌데... 말 그대로 선물, 너무 감사해서 드리는 선물인데 이것도 불편한 건가?


별이가 태어나고 '너도 커서 엄마 되어 봐라.'는 현실이 됐다.




선생님께 보낼 선물을 고르는 데에 오랜 시간을 들였다. 뭐를 좋아하실까? 어떤 브랜드를 사 드리면 정성과 감사가 적절히 전달될까? 혹시 부담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닐까? (물론 봉투는 넣지 않을 예정이다.) 어린이집 선생님 덕분에 무사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고 별이도 튼튼하게 잘 자랐다. 선생님은 별이와 친구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고 가끔 재미있는 율동도 가르쳐 주셨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요 근래 제일 감사한 분이다. 진심이 담긴 편지라면 두 장 세 장도 쓸 수 있을 정도다. 키즈노트에 늘 쓰는 감사의 댓글보다 훨씬 더 정성스럽게 적을 거다. 선물을 포장하며 이걸 드릴 때 선생님 얼굴에 떠오를 밝은 미소를 기대한다. 마음이 물건의 형태를 띠고 전달되는 것. 인간이 발명한 것들 중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것들도 있는 거였다.


생활기록부 마감을 하며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어느 학교에서는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에 원하는 내용을 넣어달라며 타이핑한 내용을 문자로 보내는 학부모가 있었다고 한다. 청탁금지법 때문에 뭔가를 받는 것이 전면 금지되어 있지만 - 당연히 뭘 받고 싶은 사람도 이제는 없을 것이고 - 여전히 청탁은 그대로인 거다. 성적 관련 위법 행위라 들어줄 수 없다고 하면 학부모가 도리어 '이것 때문에 우리 아이가 대학을 못 가면 소송 갈 준비 하시라.'는 맥락의 협박까지 한다고 한다.


마음이 마음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얼마나 좋을까? 굳이 법으로 금지하지 않아도 선을 지키며 좋은 마음만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오랜만에 혜윤이 어머니의 마음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5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케이크를 준비하던 우리 엄마의 마음도. 건네는 선물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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