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Apr 17. 2022

정답을 찾아서

육아불안 되짚기 - 엄마의 일기



© Clker-Free-Vector-Images, 출처 Pixabay


나는 정답을 찾고자 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도통 모르는 분야였다.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참고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과서가 있다 한들 그중 몇 퍼센트나 내 아이에게 적용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남들은 모두 찾은 정답을 나만 찾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암중모색의 시기는 불안 그 자체였다. 나는 자주 별이에게 실수를 했다.






수면 교육이 유행하던 때였다. 서점에서 우연히 들추어 보고 그 책을 사서 정독했다. 모르는 분야에 접근하기에 책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잠을 재우는 데 필요한 공식을 놀라운 마음으로 노트에 옮겨 적으며, 아직 배 속에 있던 별이를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생각했다. 얼굴 본 적 한번 없이 그저 존재를 느낄 뿐인 태아는 내게 다루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와 내가 어떤 관계로 엮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분명하게 아는 사실은 첫째, 신생아는 밤낮없이 우는 존재라는 것과 둘째, 잠이 많고 쉽게 피로해지는 내게 육아의 시간이 절대 녹록지 않으리라는 공포였다. 효율적인 다룸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 접해본 적 없는 관계가 목전에 있는데 나는 고작 그런 생각을 했었다.



효율을 생각하다 책만 보고 작디작은 아이에게 적용한 수면 교육을 나는 아직도 후회한다.



안아달라고 울어도 안아주면 안 돼요.
아이가 심하게 울거나 토하는 순간을 잘 이겨내야 광명이 찾아와요.



그 말이 왜 정답이라고 여겨졌을까.



나는 정답이 필요했으니까, 많은 아이에게 적용된다는 그것을 재빨리 배워 알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아이의 울음 뒤에 숨은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별이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국민육아템’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많은 아기들이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돈값하는 육아용품에 국민○○이라는 별명이 붙곤 했다. 성공확률이 높은 물건을 많은 이들이 원했고, 구매희망자가 많으면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국민 자가 붙은 물건은 대개 다른 것보다 얼마씩 비쌌다.



아이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예의 그 단톡방이 시끄러워졌다. 국민이유식수저와 국민이유식용기, 국민빨대컵이 거론됐다. 이 물건들이 정답이라면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걸 마련해야 했다. 육아서에 명시해 놓은 이유식 시작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구매한 후 택배를 기다리면서, 그 물건들이 다 도착하여 하나씩 씻고 소독하는 시간을 계산하고 그러면 ○월 ○일 정도에는 이유식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종지에 담아 찻숟가락으로 먹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뭘.”



친척 언니가 위로 삼아 던진 말에 나는 그녀처럼 허술한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국민○○에 적응하는 데에 별이가 실패하면 화가 났다. 일부러 더 좋은 물건을 찾아 샀는데 넌 왜 이걸 제대로 쓰지 못 하는 거니! 사방에서 ‘우리 아이는 이걸 너무 잘 써요.’ 팡파르를 울리는데 왜 나는 이런 분노 속에 있는 것일까. 실상 별이가 그걸 요청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이가 아플 때는 이런 분노는 좀 다른 형태를 띠었다. 24시간 밀착하여 관찰하고 있는 존재가 평소와 컨디션이 다르다는 것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순간 지나가는 것인지, 병원에 가 봐야 할 일인지, 더 정밀한 검사를 받아봐야 할 일인지까지 내가 다 알 수 없었다. 가족들은 으레 그걸 내가 알 거로 생각했었고 때문에 아이가 심하게 앓으면 나는 기꺼이 그 화살을 맞았다. 대놓고 눈치 주는 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나 스스로 그들의 화살집에서 날카로운 촉을 꺼내어 내 심장에 찔러넣곤 했다. 아이 몸에 관한 것은 엄마가 잘 알고 있어야 한다기에 항생제의 종류와 발음하기도 어려운 병명을 섭렵했다. 몇 번씩 병원을 가도 아이가 낫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화와 의사에 대한 화가 동시에 났다.



나아가서는 무서웠다. 아이를 해치는 주체가 내가 될까 봐. 많은 엄마들이 병원보다 먼저 인터넷 공간에 자기 아이의 적나라한 환부를 사진으로 올려놓고 ‘이거 왜 그럴까요’라며 질문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불안과 공포 앞에서는 냉정한 전문가보다 함께 욕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더 신뢰로웠다.



내 아이가 왜 아픈지 정확히 진단하고 제대로 고쳐달란 말입니다!
그러게, 그 의사는 왜 정답을 못 찾는데요?
... 나는 왜 아이가 불편한 것이 무엇인지 정답을 못 찾고 있는 걸까요?



그런데 정답이라는 게 정말 있긴 했나? ⏯



(다음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어느 단톡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