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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Apr 21. 2022

의지

별님일기



© iamromankraft, 출처 Unsplash


한참 살이 찌며 외모가 망가지던 시기. 아이아빠는 갑자기 해외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겠다며 매일 밤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다. 그 공부를 꼭 해야 하는지 내게는 설득이 없었다. 아이아빠는 이 일이 잘 되면 해외에 나가 살 수 있다고 통보했다. 단기적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이민을 갈 수 있다는데 내 직업은 해외에 나가서 이어가기 힘든 일이고 살면서 이민을 고려해 본 적도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아이아빠는 통보는 한결같이 '내가! 내 덕분에! 해외에 나갈 수 있는데! 떨떠름하게 굴다니 고마운 것도 모르는구나!!'였다. 아니, 이민 정도의 큰일이면 나하고 상의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어쨌든 6개월여에 걸쳐 아이아빠는 계속 12시가 넘어 들어왔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별이를 키웠다. 아이아빠도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힘들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한참 손이 많이 가는 월령이었는데 엄마께 감사해서 매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사이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 3일마저도 아이아빠는 스터디카페에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다. 할머니는 내게 엄마와 같은 존재였기에 모친상에 비견할 그 자리를 아이아빠는 '자격증 공부'를 위해 떴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아이 놀이매트 위에 널브러져 울음을 터뜨렸을 때, 별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대로 나를 안고 토닥토닥거리면서 말했다.



엄마.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만 울고, 뚝!



난 그 말을 듣고 더 울었다.






어느 시점이 넘어가자 아이아빠는 내가 바닥까지 지쳐가고 있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몇 년 만에 가방 선물을 해 준다고 백화점 1층으로 데려갔다. 당신이 이제껏 고생한 것이 고마워 사주는 거다 하면 됐을 텐데, 아이아빠는 '앞으로 몇 달 안 남은 자격증 시험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미야'라고 했다. 뇌물이든 선물이든 상관없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기특하다 했다.



별이, 아이아빠와 함께 이 매장 저 매장 돌면서 가방을 메어 보는데, 거울 속에 회복되지 못한 피곤이 그대로 드러나니 자꾸 머쓱해졌다. 예쁜 가방을 들어봤자 저 모습이 어디 갈까 싶어 울적해졌다. 그러다 보니 위축됐고 직원의 설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별이가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와~ 우리 엄마 이~쁘다!



당시 세 돌이 갓 넘은 아이의 말에 같은 공간에 있는 모두가 함박웃음이 터졌다. 거울 속의 나도 잠시 피곤이 사라지고 웃고 있었다.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 주부터는 아이아빠가 3시간 거리에 있는 직장에 다니게 된다. 아침저녁 통근하기에는 너무 버거우니 월요일 새벽에 내려가 금요일 저녁에 올라오는 일정으로 살기로 했다. 이사 후 친정과도 거리가 멀어져 이전처럼 아침저녁으로 친정엄마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온전히 나와 별이 둘이서 해 내야만 한다. 이제 별이와 나는 페어다. 아이의 등하원과 엄마의 출퇴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 무사히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별이에게 티셔츠 입는 법을 제대로 가르쳤다. 두어 번 시도해 보더니 이제 곧잘 입는다. 가방을 메고 보조벨트 하는 것도 가르쳤다. 소근육 발달이 더딘 아이라 손쓰는 것이 어색하긴 하다.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아이아빠는 6개월 여의 늦은 귀가를 마치며, '다른 사람들은 1년을 이 공부만 하면서 준비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고, 더 제대로 준비하고 시험 보는 게 낫겠다'라며 중도 포기를 선언했다. 주중 육아의 모든 것에서 스스로 면제됐던 아이아빠의 6개월여의 시간이 그렇게 훨훨 날아갔다. 그래도 시험이라도 한번 보고 포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나한테 미안하지는 않냐고 묻는 아내에게 그는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당신한테 왜 미안하냐'라며 대꾸했다.



저 인간 진짜 벌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저 인간'은 벌을 받게 된 거 같은데, 덕분에 나와 별이까지 좀 더 고생하게 됐다.



   "별아, 이전에 엄마랑만 잘 때 생각나? 우리 이제 팀이야. 별이가 엄마 꼭 도와줘야 돼."

   "알았어~"

   "별아, 이전에 엄마랑 백화점 갔을 때 별이가 '우리 엄마 예쁘다'해서 엄마가 너무 행복했었지. 그것도 기억나?"

   "응!"

   "별이한테 고마웠어."

   "응, 엄마. 근데 지금도 예뻐!"

   "응? 엄마가?"

   "응! 지금도 예뻐, 엄마~"



나는 소녀처럼 입을 가리고 몸 둘 바를 모르며 웃었다. 어디서 저런 말을 배운 거지? 가르친 사람 상 줄게요!



별이의 말에 나는 가장 예뻤던 시절로 돌아갔다. 뭘 발라도 뭘 둘러도 생기 하나로 반짝이던 그 시절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 생각했는데 별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조금 다르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벌여놓은 장난감 난장판을 정돈하면서도 실실 웃음이 났고, 또 식판에 한참 남겨놓은 채소 더미를 치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걱정도 불만도 많던 하루가 '예쁘게' 마무리됐다.



이전에는 정말로 몰랐다. 작은 아이가 어떤 식으로 의지가 되는지. 그 의지 덕에 버틸 힘을 얻게 된다는 것도. '나'라는 외연 안에 별이의 순수함과 조건을 떠난 행복, 그리고 넘치는 사랑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별이가 늘 말하던 사랑 주머니. 사랑 주머니가 넉넉해지면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고 살아갈 힘 또한 충전된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다짐해 본다. 다음 날 아침도 별이는 떼쓰고 편식하며 엄마 속을 득득 긁어놓겠지만 잔뜩 충전된 사랑 주머니 덕에 그 화가 일부 녹아질 것만 같다.



관계 속에서 힘을 얻고 살아감을 배운다. 별이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 하나 더 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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