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로카에서 배운 찰나의 고요함
영국의 6월이 왔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6월의 바람은 한국의 가을을 떠올리게 한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분 좋은 따스함이 살결에 닿는다.
6월, 나는 35세 이하 여성들을 위한 명상 수련회 [Sub35 Women Weekend]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타라로카 [Taraloka]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나에게는 5월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수련회다.
타라로카는 잉글랜드를 넘어, 북웨일스 산기슭에 자리한 여성 명상 수련장이다. 이곳에선 영국 각지에서 모인 35세 이하 여성들이 함께 불교 공부를 하고, 명상 수련을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5월까지만 해도 밤공기가 차가워 나는 패딩 점퍼를 입고 야외 명상실로 들어갔다. 길고 긴 영국의 겨울을 지나, 여름인 척하던 5월을 지나, 드디어 나는 자신 있게 다운재킷을 챙기지 않아도 되었다.
명상 수련회 가방에 내 물건을 적게 챙겨 가면 갈수록, 더 깊은 경험을 담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여름 수련회는 정말이지 챙길 것이 없었다. 나는 내가 가진 짐가방 중 가장 작은 케이스를 가볍게 차에 실었다.
5월에 참여했던 ‘새들의 노래를 숨결로 [Breathing in Birdsong]’ 명상 수련회의 여운이 잔잔하게 남아 나를 들뜨게 했다. 야외 천 텐트가 타라로카 숲길 옆에 설치되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명상을 했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햇살을 받은 나무 그림자가 명상실을 덮었고, 그림자는 바람을 따라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룹 명상을 마치고 비스듬히 누워 텐트를 바라보면, 물속에 잠긴 듯 평온했다. 비가 내리면 (영국의 5월은 변덕스럽다) 빗소리가 텐트를 두드리고, 그 소리가 금세 잠잠해지면 타라로카 숲 속에 사는 새들의 지저귐이 명상실에 울려 퍼졌다. 밤이 오면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소녀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쿠션에 기대거나 비스듬히 누워, 오래된 멤버가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를 들었다.
마이트리데비 [Maitridevi] — 그녀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친절’ 또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오래된 멤버 중 한 분으로, 이곳 타라로카에 거주하신다. 지난 ‘새들의 노래를 숨결로’ 명상 수련회를 이끄셨던 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정말 다정한 초록빛 눈을 가지고 계셨고, 길고 빛나는 은빛 곱슬머리, 그리고 아치 모양의 두꺼운 눈썹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셨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곳 타라로카에 사는 새들 — 호비(Hobby), 제비(Swallow), 메뚜기 휘파람새(Grasshopper warbler) — 의 소리를 정확하게 따라 하고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녀를 ‘새들의 여왕’이라 부르곤 했다.
그녀가 이끄는 나의 첫 여성 명상 수련회는 깊고, 아름다웠다. 수련회 마지막 날, 나는 이미 결심했다. ‘이 마법 같은 세계에 다시 와야겠다.’
그러니 지난 수련회에서의 기억과 기대를 안고 여름 수련회에 참여하는 마음이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3시간을 부지런히 운전해 타라로카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귀여운 마을 몇 개와 농장을 지나면, 타라로카로 이어지는 좁고 긴 길이 나온다. ‘Taraloka’라고 쓰인 나무 표지판이 보이고, 양쪽으로 보리밭이 펼쳐져 있다.
나는 자전거 타듯 속도를 최대한 줄이고, 양쪽 창문을 열었다. 길가에 고개를 숙인 보리들이 차를 스치며 탁탁 탁탁...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차창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은 따뜻했고, 이마에 닿는 햇살은 느긋했다.
드디어, 여름 수련회다.
대부분의 불교 명상 수련회가 그렇듯, 내가 참석한 이 수련회에서도 휴대폰 전원을 끄거나 팀에게 맡기기를 권유한다.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잠시 디지털 에너지에서 벗어나, 진짜로 쉴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의도다.
라운지에서 만난,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친구는 폰을 집에 두고 왔다며 자랑했다. 자랑할 만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운전할 수 있는 존재구나. 멋지다.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면허를 딴 초보 운전자인 나는, 그녀가 너무 대단해서 “와... 와... 와...”만 되풀이했다.
나는 비상 연락처를 아버지께 미리 보내드리고, 짧게 영상 통화를 한 뒤 전원을 껐다.
내가 소유한 많은 물건들은 내가 원해서 산 것이지만, 사실 꼭 필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휴대폰은, 내가 원해서 산 건 아니지만 꼭 필요한 물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 휴대폰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즐거웠다.
안녕, 휴대폰.
너는 너무 똑똑하고, 너무 빨라서…
가끔은 조금 부담스러워.
잘 가.
휴대폰이 내 손에서 사라지자, 그걸 통해 연결돼 있던 모든 것들도 함께 멀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처리하던 작고 중요한 일들. 사진, 음악, 책, 메모들. 무엇보다도,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조급함. 그 무게들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진 단순한 일상의 행위들이 더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는 낯선 사람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마치 선물처럼 내 몸의 감각들이 또렷해졌다. 나는 휴대폰을 팀 멤버에게 조용히 건네드리고 방으로 향했다.
수련회에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침대는 안식처이자 작은 작업실이다. 중요한 건 침대 그 자체가 아니라, 침대에 앉았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나는 방 안에 놓인 세 개의 침대에 하나씩 앉아 본 뒤, 아래층에 비어 있던 침대도 슬그머니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늘 정원과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창문이 있는 자리를 골랐다. 조용히 글을 쓰고 책을 읽기 좋은 자리였다.
풀 것도 별로 없지만, 알람 시계, 책, 공책들을 작은 서랍에 넣는다. 침대에 눕는 순간, 그제야 장시간 운전과 일주일의 피로가 천천히 밀려온다. 그리고, 새로운 룸메이트 K가 도착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가 그렇듯,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우리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나눴다. 이름, 사는 곳, 리트릿이 처음인지 등.
나는 습관처럼 말했다.
“제 이름은 선[Sun]이에요. 하늘에 있는 태양[Sun]처럼요. 샘 Sam이 아니라, 선 Sun이에요.”
내가 좋아하게 된 이 습관은, 유학생 시절 생긴 것이다. 그땐 우버가 아니라 택시를 직접 전화로 불러야 했는데, 기사님들은 늘 앞에 있는 나를 두고 “Sam”을 찾곤 하셨다. 내 발음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선(Sun)’이라는 이 낯선 이름이, 그분들에겐 익숙하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기사님이 나를 두고 '(Sam) 샘'을 찾지 않도록 늘 자세히 설명을 드리곤 했다.
모두가 묻진 않지만, 그녀는 내가 영국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이름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저는 한국인이에요. ‘선’이라는 이름은 착할 선(善) 자로, ‘선함’을 의미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잠시 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질문을 건넸다.
“근데 선… 혹시 휴대폰은 어떻게 하셨어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대답했다.
“전원 끄시고요, 저기 빨간 갈색 머리 팀 멤버 분께 맡기시면 잘 보관해 주세요!”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약간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휴대폰, 어떻게 끄는지 아세요?
작년 4월 비파사나 명상 [비파사나는 말없이 머무르며, 오롯이 나 자신을 바라보는 통찰의 명상이다] 이후로 한 번도 꺼본 적이 없어서요.”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요즘 너무 어렵게 만들어놨죠. 버튼 두 개를 동시에 꾹 누르시고요, 화면에 뜨는 슬라이드를 오른쪽으로 밀면 꺼져요…”
그렇게 해서, 우리 방의 모든 휴대폰들이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수련장 어디에서도 휴대폰을 쓰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은 내가 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뭐랄까…
이 공간은, 오롯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명상실로 들어가 주말 동안 수련할 명상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들은 뒤, 저녁 명상을 함께했다. 굉장히 단순한 수련이었다. 우리는 ‘지구, 불, 물, 공기, 공간’ 다섯 가지 원소를 탐색할 예정이었다.
불교에서는 물질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각 원소는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구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물은 유동성과 응집력, 불은 온기와 열기, 공기의 원소는 티베트 불교에서 이산화탄소 같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바람, 숨결, 움직임과 같은 에너지 흐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원소를 담고 있는 그릇이 바로 공간이다. 불교에서는 이 위에 하나를 더 놓는다. 바로 의식(consciousness)이다.
우리의 수련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원소에 대한 간단한 강의를 듣고, 단체 명상을 한 뒤, 명상실을 나와 그 원소와 연결된 활동을 통해 직접 경험하는 명상을 했다. 명상이라고 해서 꼭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물론 더 깊은 뜻이 있겠지만, 초보 불자이자 명상 초보자인 나에게는 이런 방식이 오히려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왜냐하면, 이 모든 원소들은 내 몸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두꺼운 경전을 펼치지 않아도, 알아듣기 어려운 산스크리트어 용어 앞에서 괜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원소들을 해석했고, 저마다의 연결 방식을 찾아 명상을 실천해 나갔다.
예를 들면, 지구(Earth) 원소와 연결되기 위해 맨발로 흙 위를 걷거나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기서 명상이라 할 수 있는 포인트는, 그것만을 하는 데 있다. 말을 하며 걷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마음이 분산된 상태가 아니라 맨발로 흙의 단단함과 중력을 오롯이 느끼며 걷는 것, 그것이 명상이었다. 10분 걷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불(Fire)의 요소는 — 장작을 피우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몸이 가진 따뜻함, 혹은 요가나 점프 후에 느껴지는 열기로도 체험할 수 있다.
물(Water)의 요소는 리트릿에 있는 연못이나 개울을 바라보며 느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명상을 해보았다.
차를 사랑하는 이 나라, 영국에서 내 찻잔은 늘 다 마시기도 전에 식어버리곤 했다.
항상 다정한 동료들은 “차 마실 분~” 하고 부르며, 포트에 물을 넉넉히 데워 2~3인분씩 차를 돌렸다.
나는 그런 따뜻한 호의를 받으며 차를 마시면서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일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차는 내 책상 한쪽에서 조용히, 천천히 식어갔다.
이번엔 달랐다. 차만 마셨다.
그 따뜻한 온기, 한 모금.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저 자연 한가운데 있었을 뿐인데, 타라로카 산기슭을 지나가는 바람, 내 발끝에 전해지는 땅의 단단함,
요란한 곤충들의 울음과 새소리…이 모든 것이, 마치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야."
나는 이번 명상 수련의 테마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말이지...
지구, 불, 물, 바람...
그리고
꽃가루가 있었다.
그렇다, 애달프게도. 찰나의 ‘의식(consciousness)’ 단계로는 넘어가지 못한 채, 나는 꽃가루 알레르기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에취… 에에취… 명상 수련회에서 꽃가루 알레르기라니. 그것도 타라로카에서. 그것도 여름 리트릿에서.
기침이 심해지자 나는 야외로 나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고요함이 명상실을 덮을 때, 나의 요란하고 눈치 없는 기침은 그 침묵을 깨트렸다.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명상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차라리 기침만 멈출 수 있다면, 30일 동안 침묵하는 비파사나 명상도 가겠어.” (참고로, 나는 비파사나 명상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
명상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방해가 되었을까. 방으로 돌아와 급하게 알레르기 약을 먹었다. 그 약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명함 Clarity’. 그런데 오히려 눈만 감겼고, 코는 여전히 간질간질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코와 눈에서는 물의 원소가 흘러나왔다.
한쪽 콧구멍으로 겨우 숨을 쉬다가, 그마저도 물의 원소에 막혀버리자 입으로 숨을 쉬며 ‘마음챙김 호흡’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지도자 분들이 다정하게 설명해 주셨던 원소들의 성질은 모두 잊혀졌고, 지금은 그저 꽃가루 생각뿐이었다.
나는 마지막 원소인 ‘의식’의 문턱에도 닿지 못할 예정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젊은 수련생들은 연꽃이 피어 있는 작은 연못에 모였다. 수면 위에 거울처럼 푸른 하늘이 비쳤고, 보라색, 노란색, 불긋한 야생화들이 들판에 가득 피어 있었다. 수련생들은 초롯빛 잔디 위에 누워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강을 따라 산책을 나가고, 햇살 아래에서 낮잠을 잤다.
그 풍경은 완벽했다. 그런데 나는 지쳤다. 꽃가루가 없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정인선! 지금 이렇게 하늘은 푸르고, 타라로카의 숲은 녹음이 깊어졌고, 햇살은 딱 좋은데… 정말 침대에 누워 있으려는 거야? 언제는 이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라며 그렇게 말해놓고… 내일은 비 올지도 모르잖아! 너도 알잖아, 영국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안절부절못하며 라운지에도 가보고, 야외 명상실 오두막에도 가 앉아봤다. 하지만 여름 리트릿의 모든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 뭐. 나에겐 하늘 정원 전경의 창문이 있잖아.
그 창밖을 보며, 그냥 시집이나 읽자.
일광욕(sun bath), 산책도, 낮잠도 못했지만 그건 그렇게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방에 들어서자 커튼은 꼼꼼히 쳐져 있었고, 깜깜 했다. 룸메이트는 달콤한 낮잠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나는 하늘 정원 정경을 꼼꼼히 가리 커튼 옆에 있는, 작은 조명을 켰다.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시집을 꺼냈다.
《최초의 자유로운 여성들 – 초기 불교 비구니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시들》
《First Free Women - Original poems inspired by the early buddist nuns》.
작년 겨울, 열흘간 머물렀던 아디슈타나 [Adhiṣṭhāna] 불교 센터에서 처음 만난 시집이었다. 나는 이 시집을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이 다 가도록 아껴 읽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책이 한 권쯤 있지 않을까? 아니면, 네플렉스 시리즈가 될 수도 있다. 오늘도 표시해 둔 몇몇 시를 다시 읽고,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그렇게 천천히,
두 편의 시를 넘기고,
[The Third Sister]라는 시를 읽다가
나는 잠시 숨을 깊이 쉬었다.
그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
......
고요 속에서, 당신은 무너질 수도 있어요.
혹은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죠.
Here in the stillness, you’ll break.
Or you won’t.
언젠가는, 당신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마주해야 해요
Sooner or later, you have to get in there
and see what you’re made of.
이건 풀밭이 얼마나 푸르른지,
하늘이 얼마나 파란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This isn’t about how green the grass is
or how blue the sky.
이건, 자유에 대한 이야기예요.
This is about freedom.
나는 시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풀밭이 얼마나 푸르른지, 하늘이 얼마나 파란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This isn’t about how green the grass is or how blue the sky.
이건 자유에 대한 이야기예요..
This is about freedom….
다시 한번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나마 내 안의 고요함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평온함이 느껴진다.
브리스톨 불교 커뮤니티의 친구 Y가 했던 말처럼, 신기하게도 진짜 필요한 시는, 필요한 순간에 나를 찾아온다.
다음 날, 마지막 수련회의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연못 위에 피어 있던 연꽃들은 하나둘씩 다시 봉우리를 닫았다. 나는 차에 올라 3시간을 달려 브리스톨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단 한 번도 기침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불교 명상 수련회는 내가 꿈꾸던 완벽한 여름 수련회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따뜻한 햇살 속에서 조용한 명상을 하지 못했고, 물속을 걷는 듯한 고요함도 느끼지 못했으며, 꽃가루에 밀려 명상실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타라로카에서 나는 다정함을 느꼈고, 받아들여졌으며, 작은 조명 아래에서 시를 읽을 수 있었다.
타라오카에 사는 불교인 한 분이 보드에 붙여놓은 작은 봉투에는 내 알레르기 약보다 다섯 배는 큰 핑크빛 알약이 담겨 있었다.
그 누구도 내 기침에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알레르기 괜찮으세요? 힘들죠....” 하고 물으며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어주셨다.
이런 다정함이 나를 고요하게 만든다.
불완전한 나를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조용히 받아들였던
그 찰나의 순간—
자유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This is about freedom.
이것은 자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This is about the journey.
이것은 여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타라로카,
여름의 시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