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있으나 아름다움 따위는 있을 수 없어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3년, 전공을 바꾸고 파리로 상경한지 어언 3년차가 되던 해. 나는 대학원생으로 파리 3대학에 입학했다. 어릴 적부터 몇년마다 나라를 옮기던 게 학습이 된 건지, 그냥 내 사주에 역마살이 낀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제 내 안에서 3년이라는 시간은 일종의 타이머같은 게 되었다. 처음으로 한 나라에서 체류한지 5년이 넘어가려는 시점에서, 학사를 마치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환경이 바뀌었다. 관광객과 한인마트, 일식당들이 즐비하던 동네에서 조용한 대학 동네로 통학하게 되면서 더더욱 통감했다.
앞으로 1년. 석사 1학년을 여기서 무사히 마치자는 목표만 가졌던 것 같다. 앞서 말했다시피 프랑스의 대학원은 1학년, 2학년을 따로 지원한다. 1학년 잘 마치고 진급한대들 같은 과에서 석사 2학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다 1학년, 2학년 모두 논문을 써야 한다. 물론 교수님에 따라 1학년 때 소논문 또는 목차 정도만 보고 넘어가주는 분도 계시다. 하지만 그런 보살같은 교수님은 내 팔자에 어림도 없었으니.
이야기를 되돌려서 파리 3대학에 문화기획경영 전공으로 편입하게 된 나는 프랑스에서 처음 본 대학 캠퍼스의 광경에 매우 무덤덤했다. 문장 끝맺음이 이상하지 않냐고? 우리나라의 대학 캠퍼스는 거의 마을 하나 규모인데, 선진국 프랑스는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않겠냐고 막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리가 어떤 도시인가. 서울의 10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의 도시인데 인구는 서울과 비슷하다. 그런 좁은 땅덩이에, 어떻게 파리 국립대 10여개 + 무수한 전문학교 + 사립학교까지 들어가겠는가. 내가 학사를 지낸 학교의 경우 본교 건물은 딱 하나에 전공을 몇개로 나누어 각자 다른 동네에 다른 건물에 한층씩 임대해 썼었다. 이러니 학교 다닌다는 느낌이 덜할 수밖에. 프랑스에서 유학해보신 분들은 아시리라 믿는다. 그나마 든 생각은 '국립대라 캠퍼스가 있긴 하네' 정도? 큰 본교 건물 하나와 옆에 딸린 두번째 건물 정도면 훌륭하지. 본교 건물은 일자로 뻗은 긴 직사각형 건물이었고 중앙에 큰 계단이 있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학교 건물이었다. 확실히 국립대가 맞긴 한지 꽤 많이 낡았고, 그래서인지 나는 어디 흔한 미국 고등학교 건물같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에 들어오니 선택강의의 종목이 조금 늘긴 했지만 그래봤자였다. 한국이나 미국 같으면 자기 스케줄표 자기가 짜느라 다들 고생한다고 하는데, 프랑스는 대학원에 들어가도 필수과목이 먼저 채워지고 선택이 필요한 과목은 수강신청을 하면 된다.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안해봤으니 모르지만 친구들로부터 들은 잔혹사에 비하면 무난한 편. 수강신청은 일찍만 하면 문제없이 원하는 수업을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 쓰는 수강신청용 웹사이트 (세상 그 어떤 대학도 제대로 못 만드는 듯한 내부 인터페이스...)는 딱 필요한 것만 갖춰져 있었고 다행히 수강신청하면서 사이트 오류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내 스케줄표를 대부분 예술에 초점을 맞춰서 미술사, 미술행정, 문화 프로젝트 기획, 법학, 등으로 채웠다.
대망의 첫날. 결코 크지 않은 건물 내에서 강의실 찾느라 바빴고 안에 들어가면 적당한 곳에 앉느라 눈치싸움을 벌였다. 선택강의가 많아지니, 강의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았다. 학사를 졸업한 학교도 나름 소규모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눈치보면서 같이 다닐 동기들을 점찍어 놨다면, 여기선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아니, 사실 모색하려 노력은 했지만 2-3개 이상 같은 강의를 듣는 동기를 찾기 어려웠다. 그마저도 인원이 많아서 얼굴을 익히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석사니까 많아봤자 30명이었지만. 얼굴 먼저 익히고 이름은 나중에 외웠다...) 건물은 작았지만 사람은 많았고, 처음으로 '혼자'라는 실감이 강하게 들었다. 다른 학생들도 그래 보였다. 더 이상 고등학생이나 대학교 신입생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고, 무리지어 다니기엔 다들 바쁘니 말이다. 당시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도 혼밥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대학원에 들어가고부터는 거의 매일 혼자 먹었다. 나중에 친한 동기들이 생겼을 때 간간히 같이 먹거나 수업 같이 가거나 했지만, 혼자 있는 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가 이걸 불편해하거나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학원은 철저히 개인주의와 개인플레이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였다. 여기서 1년 동안 얼른 적응하고 석사 무사히 마치자는 생각 뿐이었다.
그 해, 나는 두번째 (제대로 된) 논문을 쓰게 되면서 내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