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오셨다. 커피 한잔 달라시는 엄마께 예쁜 찻잔에 믹스커피를 타드리고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내 얼굴을 찬찬히 보시더니 얼굴의 잡티와 주근깨가 많아졌다며 왜 피부과를 안 다니냐고 타박이시다. 피부과도 다니고 마사지도 하고 예쁘게 꾸미고 살란다. 엄마의 “여자는 항상 예쁘게 가꿔야 한다”는 레퍼토리는 여전하다. 엄마는 젊어서부터 남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고 77세의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정기적으로 피부과 시술을 받으시고 일주일 한번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신다.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뜨거운 볕에 민낯을 드러내고 농사일을 해야 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 멜라닌색소가 유난히 발달한 엄마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리는 건 당연했고 주근깨와 잡티가 가득 뒤덮여 있었다. 그걸 가리기 위해서인지 엄마는 일을 안 하는 날에는 시골 농사꾼답지 않게 짙은 화장을 하고 계셨다. 곱게 화장을 하고선 딸들에게 여자는 예쁘게 꾸며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엄마의 유전자를 받은 우리 자매들 역시 주근깨 소녀들이었다. 유독 잘 탄다는 바닷가 볕 아래에서 매일 뛰어놀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었던 어느 날 엄마가 비장한 표정으로 주근깨를 없애 주겠다며 따라나서라고 하셨다. 나와 셋째 언니는 엄마를 따라 동네 의원에 갔고 12년 인생 최고의 고통을 맛보았다. 마취연고도 없이 전기침으로(과연 레이저였는지 의심스럽다.) 무자비하게 주근깨 부위를 지져댔다. 소심한 성격 탓에 의사에게 아프다 말 한마디 못하고 소리 죽여 울면서 살을 태우는 고통을 참아냈다. 마지막 타자였던 엄마는 거의 얼굴 전체를 빈틈없이 태워낸 듯했다. 눈물범벅 세 모녀는 주근깨를 원망하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10년 전 엄마는 피부과 레이저 시술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주름제거 수술을 하겠다며 현금뭉치를 들고 올라오셨다. 큰 수술이라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니 위험을 느낀 우리는 결사반대를 했지만 엄마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난 늙어가면서 주름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고, 어차피 주름은 더 늘어갈 건데 왜 위험하게 수술을 하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전문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적당한 시술을 하기로 결정한 그날, 엄마가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엄마, 아빠 두 분이서 모임을 갔다가 아빠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누군가의 생각 없는 말 한마디에 크게 충격을 받으셨던 모양이다. 아빠와 동갑내기인 엄마는 유달리 동안인 아빠와 외모 비교에 예민하셨다. 그날 이후 날마다 거울을 보면서 주름살 없는 자신의 얼굴을 상상하며 한숨만 내쉬다가 수술을 결심하셨단다. 주름살을 이리로 없애보고 저리로 없애보고 하셨다며 손가락으로 했던 제스처를 보여주시는데 아차 싶었다. “우리 엄마, 여자구나" 엄마는 나이와 무관하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여자임을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더 이상 엄마를 말릴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수술 후 엄마는 아빠보다 젊어진 자신의 모습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엄마와 아빠는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남부럽지 않은 연애 끝에 20살에 이른 결혼을 하셨다. 잘 생기고 인상이 좋은 아빠를 엄마가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뱃사람이었던 아빠는 내 어린 시절 기억에 거의 집에 계신 적이 없었다. 마을에 한 두 곳 전화기가 있던 그 시절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러 갔다가 통화를 하지 못하면 성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먼바다로 고기를 잡으로 어선을 가지고 떠나는 선장이었던 아빠는 집에 오지 않는 몇 달 동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니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혼자서 기르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아빠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놀기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셨다. 김양식을 하면서 집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도 아빠의 한량기질은 쉬이 잠재워지지 않았고 그런 아빠에게 엄마는 늘 미움을 가득 담은 거친 언어를 쏟아냈다. 엄마의 서툰 사랑은 결국엔 서로를 향한 악담들로 생채기를 냈고 아빠를 점점 집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두 분의 관계는 쉬이 회복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싸움은 계속되었다.
작년 엄마가 하루 동안 기억을 잃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처방받아 온 약이 독했던지 꼬박 하루를 단기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양 최근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셨다. 다행히 다음날 정상으로 돌아왔고 검사결과도 이상이 없었다. 그날 아빠는 많이 우셨다. 집에 돌아온 엄마에게 젊은 날의 자신을 사과하며 죽는 날까지 사죄하며 살겠다고 하셨다 한다. 자랑스레 말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승리감이 감도는 듯했다.
관계 개선을 바라는 자식들의 바람과는 달리 엄마의 아빠를 향한 원망은 여전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지만 제대로 응답받지 못한 사랑은 한이 되어, 엄마 마음속 미움은 뿌리가 깊다. 엄마가 아름다워지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한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지독한 사랑이었고, 엄마의 사랑은 지금도 진행 중임을 나는 안다. 가끔은 그 애처로운 사랑이 안타까워 엄마에게 아빠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곤 했다. 아이유의 “드라마"라는 노래를 들을 때면 엄마가 떠오른다. 수줍은 소녀였을 엄마가 소년이었던 아빠 손을 잡고 온 세상 주인공이었을 때가 있었겠지. 그때는 꽃송이 꽃잎 하나하나가 엄마를 위해 피어났을 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기를 바라고 바라셨을 엄마의 삶이 단역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왔더랬다.
오늘 아침,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특하시게도 동네 분이 가져다 주신 꽃게로 국을 끓이시려고 준비 중이시란다. 결혼 생활 57년 만에 처음 해보시는 일이다. “아빠, 이제 밥 잘 차려 드시네. 엄마 내려가시면 엄마한테도 밥 차려주세요. 그동안 받아만 왔으니 아빠도 이제 해주세요~” 장난스레 부탁드렸더니 “그래야제. 하하하" 하신다. 엄마에게 아빠의 말을 전해드리니 화사한 미소를 지으신다. 엄마가 빛난다. 엄마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