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디 말보다 나은, 위로의 스킨십

말보다 마음으로, 언어보다 온기로

by 순주씨

스킨십이 주는 진하고 담백한 위로의 순간들

포옹의 한자를 들여다보면, '안을 포', '낄 옹' 자다. 품에 껴안다. 사람이 사람의 품에 포옥 감싸지는 순간.

별 말 하지 않아도, 진득한 포옹 한번이면 전해지는 깊은 이해와 위로의 마음.

내가 좋아하는 포옹이 있다. 이게 안는건지 안는 시늉을 하는건지 싶을정도로 가볍게 살짝 감싸는게 아니라, 아주 확실한 포옹을 좋아한다. 서로의 몸을 완전히 맞대어 양팔로 꽉 껴안아 품속에 쏘옥 넣고 진득하게 3초정도는 품어주는 그런 포옹.

이런 포옹의 순간이면, 몸도 마음도 온전히 이완됨을 느낀다. 그리고 몸에서 몸으로 전해져오는, 심장에서 심장으로 전해져오는 마음을 느낀다. 이 3초의 충족감은 평생토록 기억될만큼 강렬하고, 그 시간의 밀도가 높다. 그 순간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죽지않고, 내 안에 계속 살아있어 삶속에서 역동한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포옹의 순간에 느낄 수 있다. 내가 이해받고 있구나, 위로받고 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며 지금 이 순간 나는 안전하구나 하는 것들을.


손잡기도 마찬가지다. 손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일을 손으로 하기 때문에, 그만큼 손에는 많은 신경이 분포해있고 감각이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기관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의 손은 부드럽고 말캉하고, 어떤 사람의 손은 뼈마디가 느껴지고 마르고 거칠다. 손을 잡을 때면, 형용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인생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손잡기는 가벼운 인사처럼 하는 악수가 아니라, 이또한 한 3초정도는 손바닥의 결을 느끼면서 진득하게 쥐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이때도 그 3초에 수많은 감정과 마음이 전달됨을 느낀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깊은 이해와 위로가 전해진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나누는 순간

언어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 감정에 대해 설명하기에 언어는 좋은 도구가 맞지만, 어디까지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구구절절 설명하더라도, 너를 이해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언어적 소통으로 완전한 소통을 이루고 충족감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반면, 비언어적 소통, 바라보는 눈빛이나 표정, 포옹이나 손잡기같은 것들은 그 순간에 완벽한 충족감을 준다.


그건 아마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의 언어, 문학 작품이라든지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서도 어느정도의 위로를 받지만, 지금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며, 동일한 시간대를 살고, 세상을 오감으로 감각하는 살아있는 존재인 우리는 결국 또 다른 살아있는 존재로부터의 살아숨쉬는 위로와 소통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필경 고독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순간은 지금 함께 살아있어 비슷한 외로움을 통과하고 있는 존재를 감각하고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건네보는 포옹과 손잡기

평소에는 주로 말이나 글과 같은 언어적 수단을 통해서 소통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말이나 글이나 실수가 잦고,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다. 언어로 모든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기엔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렇기에 언어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 우리는 서로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때로는 언어적 소통을 할 때 도리어 우리는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겠구나라는 한계만 더욱 명확하게 느껴질 때가 있고 그럴 때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하더라도 괜시리 쓰린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이해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고 나는 이 이해의 마음이 일상 속 스킨십에서 더 잘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래도 너를 이해한다는 모순적인 마음을 전하는 건 역시 언어보다는 감각으로 전하는 스킨십이 적절한 방식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이해에 가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을 많이 할수록, 설명을 많이 하면 할수록 되려 말리는 것 같은, 오히려 더욱 이해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고 와전되는 것 같은 경험을 사람이라면 한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진실을 받아들이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최소한의 말만 하게 된다. 그리고 말이 비어 생긴 공백을 이해의 마음으로 채워넣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백속에 온전한 이해와 위로가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말보다 마음으로, 언어보다 온기로 서로를 이해하는 존재다.

요즘 들어선 말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 말이 가진 한계보다 크다. 말을 많이 하여, 내 마음을 나의 경험적, 언어적 한계에 가둬두고 싶지 않다. 언어의 한계로부터 내 마음을 놓아주고 해방시키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 동료가 이해받고 싶은 마음으로 구구절절 말을 할 때, 그저 묵묵히 눈을 맞추며 들어주고 그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그 한계로써 화답하기보다는, 그저 애썼다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진한 포옹 혹은 진한 손잡기와 같은 고요한 공백과 언어에 갇히지 않은 큰 마음을 전해보는게 어떨까.

백마디 말보다 그 공백과 놓여짐 속에서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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