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다루며 살아가기 (2)

통제의 철갑옷, '완벽하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거야'

by 순주씨

지난 글에서는 나의 경험을 가져와 어린아이의 상처와 외로움에 대해서 다뤘다.


오늘의 글은 상처받은 어린 내가 택한 고통스러운 생존전략에 대한 글이다.


허용받지 못하고, 수용받지 못하고, 성장할 품과 여유를 허락받지 못했던 경험을 한 나는, 결국 스스로를 탓했다.


"그래. 내가 피아노를 더 완벽하게 잘 쳤다면, 선생님한테 혼날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텐데. 그렇게 울 일도 없었을거고, 너무 많이 울어서 엄마를 힘들게 할 일도 없었을텐데. 이 모든 건 완벽하지 못했던 내 탓이다."


흠 잡힐 일이 없는 사람이 되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거야

어린 내가 상처와 외로움으로부터 생존하기위해 찾은 돌파구는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끝없는 완벽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그때의 경험 이후, 나는 줄곧 어떻게든 '긍정적인 상태', '잘 하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내가 '부정적인 상태', '잘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면 상처받을 위험에 놓이게 되고, 상처를 받으면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도무지 해결책이라곤 없어보이는 내 아픈 마음과 괴로운 감정은 뒤로 차치하고 스스로가 어떻게든 긍정적인 상태, 잘하는 상태로 놓일 수 있게끔 스스로를 통제하며 몰아붙였다.


그 뒤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했다. 상처받으면 손 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스스로가 완벽해야만 상처를 피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흠 잡힐 일이 없는 사람이 되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거야. 상처받고 우는 나는 엄마를 힘들게만 하고 그런 나는 엄마가 사랑해주지 않잖아. 완벽한 딸이 되자. 공부 잘하고 학교 생활도 성실히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은, 무엇이든 잘 해내서 항상 기쁘고 밝고 울지 않는, 엄마에게 기쁨이 되는 내가 되자.'


내 안에 '상처받은 아픈 나'는 내 내면 저편으로 꽁꽁 숨겨졌다.

'계속 울기만 하는, 쓸모없는 너는 거기 숨어있어. 절대 나오지마. 이게 다 네 탓이잖아. 넌 필요없어. 쥐죽은 듯이 숨어있어'


24시간 문제 없는 완벽한 나로 연기하며, 우울한 내면을 감추다

스스로를 완벽한 상태로 통제하기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한 나는, 어느정도 통제에 성공했다. 줄곧 전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반장을 도맡아했고, 울지 않고 찌질하지 않고 쿨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어 반 친구들과도 하하호호 잘 지냈다. 더이상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반장으로서 선생님 시종노릇(?)을 하며 선생님께도 신뢰받고, 권한을 위임받고, 친구들도 그런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며 먼저 다가왔다. 모든게 수월하게 판이 깔렸다. 엄마는 학교생활을 완벽하게 해내는 나를 보며 기뻐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무엇이든 잘하는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이 마냥 밝았다. 그래 된 거 같아, 이정도로 살면 된 거 같아.


그러나 청소년기의 내가 가장 친밀한 친구와 줄창 나누던 말은 '살기 싫다. 우울하다'라는 말이었다. 이런 우울한 내면은 그 누구도 모르고, 나와 그 친구만 알았다. 그 친구 또한, 겉으로 보기엔 그저 공부 잘하고 무난하고 무던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친구였다. 서로의 우울한 내면이 공명했는지, 우리 둘은 내밀한 우울함을 서로에게만큼은 필터없이 나누며 단짝친구로 지냈다. 우울로 맺어진 단짝이랄까.


하지만 우울함의 완벽한 은폐는 어려웠다. 네이트온으로 그 친구와 나누던 우울한 대화들, '의지할 사람 한 명도 없다' 이런 말을 엄마가 보고 대노를 하며 "네가 의지할 사람이 왜 없어?! 여기 엄마가 있는데 왜 의지할 사람이 없어!!!" 물어왔고 나는 그냥 그 상황을 회피하며 외면했던 기억, 학년부장 선생님이 어쩌다 그 친구와 나눈 '살기 싫다'라는 내 문자 내역을 보고 "살기 싫다고?... 기분이 안 좋아? 생리 기간이니?" 물어오기도 하고, 그럴때면 '아씨... 들키면 안되는데. 문제있는 사람으로 보이면 안되는데.' 생각하며 그냥 하는 말이고, 아무렇지 않다고 뭉개며 그 난감한 상황을 지나갔다.


자기 마음과 감정은 무시하며 '좋은 상태'로 스스로를 통제하고 상황을 통제하며 살던 나는 항상 깊은 우울감을 지니고 있었다. 엄마는 날 보며 기뻐하고, 선생님은 나를 신뢰하고 칭찬하고, 친구들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좋아했지만, 그 가운데서 난 진심이 없이 공허했다. 좀처럼, 예전처럼 엄마가 나를 보고 기뻐한다고 해서 내가 기쁘진 않았다.


엄마의 기쁜 모습은 내게 기쁨이 되지 않고 그냥 '내 할 일을 다 했다'라는 과제를 마친 느낌이었고, 선생님의 신임도 그저 내가 할만치 했으니 당연한 일, 친구들이 내게 주는 호감의 표시도 그닥 감흥이 없었다. 통제의 방식으로 살던 나는 친구들이 사소한 고민에 대해 이야기해올 때 공감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헐~ 너무 하네~' 이런 식으로 맞춰주며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타인의 속마음에 대해 별로 관심없었다. 애초에 네가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때문에, 근데 그렇게 말하면 싸가지없다고 뒷말이 나올거기 때문에, 적당히 맞춰주는 척을 하며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반에서 광대를 자처하며 친구들에게 웃음을 줬다. 친구들이 웃는 순간엔 같이 즐겁긴 했지만, 웃기기에 성공하면 이 또한 한 과제를 잘 마쳤다라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냥 이렇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아무 문제 없는 상태로, 우리 관계에 트러블없이 딱 이 정도의 거리로 잘 지내자'라는 마음이었다.


어쩌다 나와 더 친밀해지고 싶어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다가오는 친구가 있으면 부담스러웠다. 난 내 완벽한 상태를, 문제 없고 흠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 애쓰고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느라 여력이 없는데, 그 친구 이야기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너도 이렇게 통제하고 살면 되잖아. 너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해야지. 나보고 어쩌라고.' 이런 생각이었다.


우울함마저 외면하기. "나 문제 있는 사람 아니야."

그렇다. 나는 겉으로는 완벽한 딸, 완벽한 학생, 문제없는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속은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상처받고 아파하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품고 있는 진짜 나 자신을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고, 문제 없는 완벽한 나를 24시간 연기하려고 하니 매일이 중노동이었고 매일이 피곤했고 매일이 우울했다. 그 어떤 것도 진심으로 기쁘지 않았고, 진심으로 슬프지도 않았고, 공허하고 헛헛하고 우울했다.


결국 16살 무렵의 나는 이 우울함이 극치에 달아 결국 우울함을 감추고 은폐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엄마 앞에서 더이상 밝은 딸이 될 수 없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질질 끌고 학교에 가서 애써 밝은 척하며 기력을 다 쏟고 오면 집에서는 더이상 웃을 기력도 밝은 척할 기력도 남지 않았다. 온몸과 마음의 힘이 다 빠졌다. 집에서의 나는 공허하고 텅빈 눈빛을 한, 누가봐도 우울해보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우울해. 생리해? 정신과 가볼까? 왜 그렇게 우울한건데" 말했다.

그놈의 생리, 생리... 병원? 나 문제 없어. 문제 있는 사람이 가는게 병원이잖아. 나 다 잘하고 있는데 내가 뭐가 문제가 있어. 나 문제 있는 사람 아니야.


“엄마는 밝은 딸이 좋은데… 네가 우울하니까 엄마도 우울해지잖아.”

우울한 나를 보며 마음이 아팠을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밝은 딸이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안돼. 엄마가 또 나로 인해 힘들어한다. 내 울음으로 힘들어하던 엄마가 이번에는 내 우울함으로 인해 힘들어한다. 난 엄마의 짐이 되고 싶었던게 아닌데, 기쁨이 되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또 짐이 되고 있잖아.

역시 문제 있는 상태가 되면, 슬프거나 어둡거나 우울하면 이해받고 사랑받지 못해.

아 아닌데, 나 아무 문제 없는데. 근데 왜이렇게 대책없이 우울한거야. 난 행복해져야해, 밝아져야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지? 어떻게 밝아질 수 있을까.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모르겠어.

일단 행복한 척하자. 밝은 척하자. 다시 연기를 해야지. 연기를 더 완벽하게 제대로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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