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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누 Jul 31. 2023

나 한조각은 남겨놓으려구요

아기를 키우면서 나의 퇴근길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

하루종일 아기와 씨름을 하고 저녁이 되면 따뜻한 물을 받아 아기를 꼼꼼히 씻어준다. 잘 빨아 뽀송하게 말린 편한 내복을 입힌 후 배불리 먹이면 아기가 자야 하는데, 장난기가 서린 초롱초롱한 눈을 보니 영 잘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누워서 꿈틀거리는 것 밖에 못하던 아기가 무엇이든 잡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 자기 자신도 신기한 노릇인가 보다. 잠도 잊고 침대 위를 여기저기 기어 다니다가 오동통한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난간을 잡고 서기를 수십번 더 시도해 본다. 침대에 누워 그런 아기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멍하니 딴생각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지난날 나의 퇴근길이 떠오른다.


지난날 나의 퇴근길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 자체였다. 나는 햇볕보다는 깜깜한 밤의 달빛을 더 좋아하고, 무더운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밤공기에서 나는 차가운 겨울냄새를 좋아하고, 같이 있을 때보다 완전히 혼자일 때의 적막을 더 좋아하고,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를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달을 보며 걸으면서 밤공기를 맡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퇴근길을 좋아했다.


그 시절 퇴근길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지금 내가 나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못하는 아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쏟느라 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 삼십 분이라도 나만을 위해 쓰고 싶지만 하루종일 밀려드는 할 일들을 와다다다 처리하고 나면 '지금 잠들지 않으면 내일은 죽음뿐이다'는 위기감이 든다. 머리를 대자마자 지쳐 쓰러져 잠들면 하루는 서둘러 끝나고 나는 점점 더 잊혀진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랬듯이, 나도 나 자신을 잃고 목숨보다 소중한 내 아이와 가정을 얻었다.


그래도 잃어버린 내가 그리워질 때면, 나를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던 그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퇴근길에 매번 다른 종류의 맥주를 한 캔 씩 사 마셔보며, 나는 에일보다는 라거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토요일은 내내 늘어지게 자고 피곤이 풀린 일요일에는 혼자 서점을 둘러보다가 구미가 당기는 제목이 있으면 몇 권 골라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소설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쉽게 읽히면서 스토리가 짜임새 있게 몰아치는 스릴러물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장르인데도 재미를 느끼게 되면 그것 또한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이런저런 옛 생각들을 하는 동안, 아기는 실컷 앉았다 일어났다 기어 다니다 하더니 드디어 피곤해진 것 같다. 풀썩 드러누웠는데 눈에 졸음이 한가득이다. 나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데 눈은 가늘게 쭉 찢어지고 아직 이가 하나도 안 나서 말간 잇몸이 드러나는 것이 아주 웃기다. 아기가 지금은 하루종일 엄마를 찾지만 언젠가는 이제 다 컸다며 엄마한테 참견하지 말라는 날이 오겠지, 내가 그랬듯이. 그날을 위해서 나도 나를 다 잃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조각이라도 고이 남겨놓아야지. 남겨놓은 한 조각을 크게 키워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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