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누 Sep 26. 2022

나밖에 모르는 내가 엄마라니

모성애는 바로 생기는 게 아닌가 봐요

생리 주기가 굉장히 규칙적인 나는 보통 생리 예정일 2~3일 전부터 칼같이 생리혈이 비친다. 그런데 날이 차도 소식이 없어서 생리 예정일 첫날부터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너무 이른 시기라 결과가 잘못 나올지도 모르니까 제조사가 다른 두 가지 제품을 구입하는 철저함도 보였다. 그런데 나의 철저함이 무색하게도 결과는 두 개 모두 선명한 두줄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아직 초음파에 보이지도 않을 거라며 피검사를 권유했고, 검사를 하고 남편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은 대뜸 "축하합니다! 임신이 잘 되었어요."라고 하셨다.


이렇게 확실한 두줄이라니


우리는 임신을 위해 특별히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예상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인 안정감도 있었고 임신 소식을 알리면 축복받을 환경이었기에 언젠가 아기가 찾아와도 괜찮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남편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아주 좋아했고, 주변에 임신 소식을 알리니 모두가 축하해주었다. 손주가 생길 거라는 기대에 부푼 엄마는 "내가 처음에 병원에서 너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갈 때는 네가 어떻게 될까 봐 나오지도 않은 배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걸어갔었어"라며 회상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엄마 같지가 않았다.


나는 사실 몇 개월만 지나면 배가 나오기 시작할 거라는 말에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늘어난 뱃살과 두꺼운 허리를 보면 경악을 하며 다이어트를 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타이트한 H라인 치마에 종아리가 날씬해 보이는 굽 있는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것도 이제는 끝이며, 앞으로 얼마나 살이 불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현실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옷도 굽 있는 구두도 이제는 끝이구나


곧 있으면 입덧이 시작될 거라는 말에 퇴근길에 맘스터치에 혼자 앉아 싸이버거에 치킨을 우걱우걱 씹으면서는 이런 맛있는 음식도 이제 못 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게다가 일은 또 어떤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까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직장생활에 꽤 만족해온 내가 전업주부로 사는 건 가능한가? 그럼 이제 남편이랑 아이만 챙기면서 희생하고 살아야 하나?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새로 도전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임신은 분명히 기대해왔던 일이고 축복받는 일인데, 막상 닥치니 생각이 많아지고 우울감이 들었다. 동시에 자책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손꼽아 기다리는 임신인데 배 나오는 거에 충격을 받다니 진짜 너무 철없는 거 아니냐? 이제 엄마인데 애는 어쩌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못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냐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도대체 너는 모성애란 없는 거냐?


그렇게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 건 일주일이 지난 후 처음으로 초음파라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자궁 안에 아기집과 난황이 잘 만들어졌다며 의사 선생님이 보여준 흑백 화면 속에는 동그란 보름달이 떠있었다. 달은 밤 산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늘 위로를 주는 존재였다. 특히 아주 힘들었던 날에 밤하늘을 보면 어김없이 통통하고 동그란 보름달이 떠있었고, 나를 따라오는 보름달과 함께 퇴근길을 걷고 나면 다음날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려가곤 했었다.


다 잘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보름달은 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임신 5주 차, 보름달이 뜬 흑백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생각했다. 이 문제도 앞으로 차차 해결해나가 보자고. 나는 단번에 모성애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지만 나에게 찾아온 작은 생명과 천천히 친해져 보자고.

작가의 이전글 순둥한 리트리버의 얼굴에 제발 속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