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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sk Aug 15. 2024

앓던 바퀴빠진 날

비행 가방을 채우는 것들



작은 돌돌이*를 탈탈 털었다.

깜빡잊고 가 뉴욕에서 다시 산 검정 어댑터, 비상용 머리망, 실핀과 U자핀, 달러카드, 전 팀언니가 겨울에 쥐어준 핫팩, 치실, 마스크, 회사 볼펜 두 자루, 립밤, 얼마 안 남아 찌그러진 라벤더향 핸드크림, 매일 더듬어 확인하는 여권과 아이디줄 등.

공항을 오가는 길 오른팔을 무겁게 잡아끌던 것치곤 그리 든 게 없다.





가방을 뒤엎은 건 바퀴때문이다.

코로나 복귀 후부터 시원찮았던 왼쪽 바퀴가 수명을 다 했다. 지연 끝에 도착한 상하이 푸동공항에서였다.  " 어! 바퀴 빠졌어요! "

뒤따르던 후배의 외침을 들었다. 순간 기내에 두고 온 바퀴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조그만 737 비행기 곳곳을 구르고 있을 거다. 이륙할 땐 꼬리 쪽 기내 조리실 끝까지, 착륙 신호 후엔 가장 앞을 향해 데굴데굴.  청정구역*을 가볍게 통과하고 두꺼운 조종실쇠문에  '탁!' 하고 부딪혀 운항승무원 귀를 쫑긋하게 할지도 모른다.



잘가 고마워 고생많았어



어딜 바삐 구르고 있든 십년 넘게 이 땅 저 땅을 함께 밟은 친구와 알맞은 이별은 아니다. 사정없이 휙휙 돌려대는 내 운전을 견디느라 내던 '드르륵' 소리도 아직 귀에 선하다.

예상못한 웃픈 상황에 웃음이 터졌다. 일단 뒤뚱대지 않으려 노력을 기울인다.

길에서 넘어지곤 벌떡 일어나 안아픈 척하던 언젠가의 기억과 겹쳐졌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아무 일 없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이다. 그래야 실제로도 덜 아프며 무엇보다 덜 창피하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매일을 사는 '생기' 도 자주 되새긴다. 퇴사날을 정하고 나면 단정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이유다.

맘 먹은대로 감사한 것만  떠올리고 아쉬웠던 부족함은 채워 좋은 태도로 일하고.

현실은 빠질 듯 말듯 아슬한 가방의 바퀴같다.

수시로 삐그덕댄다.

피곤하면 '계획대로 몇 개월을 왜 더 해야하지. 그냥 당장 말할까' 철없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에 아쉬웠던 점도 크게 안바뀐다. 종종 걱정하실 부모님 얼굴을 떠올린다.

안멀쩡한 캐리어를 멀쩡한 얼굴로 끌듯이

불확실함 앞 두렵고 설레는 마음 위에 태연함을 얹으려 애도 쓴다.


동시에 알고 있다.

퇴근 길 무겁기만 한 가방도 막상 털고 보면 별 게 없다. 생각보다 가볍다. 완전치 않은 외바퀴로도 일단 웃으며 길은 나설 수 있다. 분명 가려는 곳까지 갈 수 있다. 시간의 유한함을 기억하는 머리, 꾸역꾸역이라도 계속 끄는 팔,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새 돌돌이를 받았다.

남은 시간을 함께 할 가방은 이전 것보다 크다.

부드럽고 탄탄한 바퀴가 달렸다.

어릴 적 신나게 타던 롤러블레이드만큼 잘 굴러가는새 가방을 채운다.

진녹색여권과 아이디줄은 오른쪽 가장 깊숙한 주머니에, 바셀린과 비상용 쪽머리세트는 왼주머니,  또 사면 네 개째가 되는 어댑터는 중간 그물망안에.

여전한 자리에 변함없는 물건들을 넣지만 홀가분함도 같이 들어찬다. 삐걱대던 바퀴가 빠져선가.

채울 수록 비워지는 지금 기분을 기억해야겠다.

무거워질 때마다 스스로 가볍게 하면서 매일을 굴리리란 맘도 함께다.





*가장 작은 사이즈의 회사 보조캐리어


*보안상 승객없이 유지해야하는 조종실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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