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와 백로 사이
모기 요놈 아주 쌤통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
란 속담을 보고 통쾌해했다. 오른 무릎 옆과 그 대각선 아래 두 방 물린 자국을 슥슥 긁으면서.
발갛게 부어올라 제법 가렵다.
'처서'*는 '더위가 돌아간다' 는 뜻. 여름이 지나 더위가 가셔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는 때를 말한다.
그래서 모기는 힘을 못쓰며,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을 타고 하늘에선 뭉게구름을 타고 가을이 온다 했단다.
' 귀엽게 다가오는 계절이네. 가을은 ' 생각하다 문득 ' 아. 이건 어제 베트남쌈 식당에서 물린 거지. '
입추도 처서도 없는 베트남 모기가 입이 비뚤어질 일은 없겠다.
사이공 (호치민의 옛이름) 에서 돌아오니 9월이다.
퇴근길이 그리 덥지 않아 놀랐다.
퇴사까지 그리고 아직 잘 모를 퇴사 너머의 날들을 향해 시간이 잘 흐르고 있단다. 서늘한 시원함이 말해줬다. 절기로는 곧 백로** 다.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때.
(지나는 시간에 '흰 이슬' 이란 이름을 붙인 조상님들의 감성에 감탄한다.)
불같은 더위에 고생했으니 시원해진 날씨가 반가워야 마땅한데 반은 반갑고 반은 놀랍다.
9월 스케줄을 다시 본다.
일본 퀵턴*** 2번, 새 취항지인 마카오, 워싱턴, 시드니, 쿠알라룸푸르, 오늘 다녀온 사이공 한번 더.
휴가낸 이틀과 두 번의 대기 스케줄이 다다.
'생각보다 몇 개 없네' 속으로 말했다가 덜컥 겁이 난다. 여길 다 다녀오고 나면 곧 마지막 달이 온다는 실감을 해서인가보다.
비행 가방을 대충 정리해두고 집을 나섰다.
오늘 깜깜한 저녁이 마음을 휘어잡는 힘은 세다.
떨치려는 듯 휘적휘적 걸어본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나오는 길,
또랑또랑 귀뚜라미 소리가 무성하다.
모기는 정말 입이 삐뚤어졌는지 눈에 띄지않고
목소리 낭랑한 귀뚜라미들만 목청높인다.
틀림없이 잘 가고 있구나. 정해진 계절의 순서대로 매년 그렇듯이.
분명하게 왔다가는 건 같은데 그걸 맞이하는 내 마음만 조금 다르다.
정신 못차리게 더웠지만
모두와 함께였던 한여름이 그리워질까.
시원한 가을 하늘 아래지만
고스란히 혼자 마주해야 할 시작의 시간을
담담하게 맞고 있을까.
모기 자국 난 무릎은 여전히 간지럽고
귀뚜라미는 점점 더 신나게 운다.
처서와 백로 사이, 늦여름의 비행이 끝나간다.
시원한 건지 서늘한 건지 잘 모를 날의 저녁이다.
* 24년은 8월22일, 24절기 중 열네번째.
** 24년은 9월7일, 24절기 중 열다섯번째
*** 체류하지않고 그 날 바로 돌아오는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