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금도 기억나는 실수

[나는 중학교 영어교사입니다]

by 선경지명
250415_학생_주도성을_돕는_프로젝트_수업(울산시교육청)_(1).jpg

#나는중학교영어교사입니다

내가 번역에 참여한 『선생님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몇 년 전 류시화 시인이 번역에 참여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시리즈 중 하나이다. 미국 선생님들의 사례를 하나로 엮어낸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아, 나도 이런 경험 있는데, 이런 상황은 미국에서도 일어나는구나, 누구나 이런 실수를 하고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구나’라고 공감하며 번역 작업을 했다.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교사 이야기, 학업부진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이끌어 내놓으라는 대학에 진학하여 멋진 직업인으로 성장시킨 교사 이야기, 신참교사로서 겪은 어려움들, 학부모와의 관계, 교사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 이야기, 학생에게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운 교사들의 이야기, 교사로서의 보람 등 많은 교사들의 에피소드들을 접하면서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면서 번역 작업을 했다. 그 중에서 나와 너무나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 부분을 번역하면서는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잊고 있던 흑역사가 떠올랐다고나 할까?

시간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나의 첫 미국 여행. 설렘을 안고 간 첫 미국여행이지만 여행을 가게 된 동기는 그렇게 설레는 상황은 아니었다. 첫 발령을 받고 6개월 동안은 너무 힘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교실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 발버둥친 6개월이었다. 내가 아무리 무섭게 한다고 해도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내 말을 점점 더 듣지 않았다. 벌써 아이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는구나, 신참인 게 딱 봐도 티가 나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어 전공자로서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애써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왠지 내 영어 발음에 학생들이 비웃는 것 같고, 아이들이 무슨 질문을 하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같이 알아보면 되는데, 내가 교사로서 자질이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되고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쯤 영어교사 신규 연수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선생님이 여름방학 때 미국여행을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별 큰 고민 없이 그러기로 했다. 영어교사로서 그래도 미국은 한 번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당시 연가를 쓰고 여행을 가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영어 교사가 공부하러 미국에 가는 것이니 자율연수를 쓰고 가라고 격려해 주신 교감 선생님에게는 지금도 감사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선배교사들이나 교감, 교장 선생님이 많이 격려해 주신 덕분에 그 힘든 시기를 무사히 지나온 것 같다.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비록 그 분들에게 내가 뭔가를 돌려드릴 순 없지만, 보고 배우고 익힌 대로 내 후배 교사들이나 제자들에게 베풀고 산다면 그 때 받은 호의에 보답하는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총 4주간의 미국여행 일정 중, 산타바바라에서 3주간은 어학 수업을 들었다. 마지막 1주간 미국 서부 일주를 했다. 3주간 어학 수업을 들으면서 내 영어 실력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자신감도 얻고, 한 학기 동안 학생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했다. 역시 아이들과 방학 동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니 2학기 때 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에게 방학은 필수인 것 같다. 여러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지 않는다면 아마 1년도 버티지 못할 곳이 학교라는 조직이다.

3주간 어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주말에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1주간의 서부 일주 때 가이드에게 그 지역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미국 역사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여행을 통해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의 장단점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한번쯤은 패키지여행도 할 만하다고 느꼈다. 여유가 된다면 패키지여행으로 전체 지역을 한 번 훑고 나서 마음에 드는 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서부 여행을 하면서 정말 많은 지역을 보고 느꼈다. 내가 경험한 여행 과정을 학생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과 나의 여행 경험담을 언젠가는 수업에서도 쓰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패키지 투어를 마치고 미국 서부 지역을 소개하는 비디오테이프를 구매해서 귀국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라스베가스 등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활용할 기회가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교무실 서랍에 넣어둔 채 한동안 잊고 지냈다.

2학기 개학 후 어느 반에서 수업 진도를 다 나가고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을 때 미국에서 사온 비디오테이프가 떠올랐다. 마침 잘 됐다 싶어 비디오테이프를 찾아 틀어줬다. 그런데 라스베가스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일이 터졌다. 라스베가스에 있는 유명한 극장인 ‘물랑루즈’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여성들이 탑 리스로 나오는 장면이 학생들에게 그대로 나간 것이다!

비디오 속 가이드가 물랑루즈를 방문했을 때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들었지만, 교육용이니 괜찮겠지 하고 계속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해서 보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순간 상의를 벗은 물랑루즈 댄서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몇 초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몇 초였을 것이다.

남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1,2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진땀을 흘리며 비디오를 급히 껐다. 남학생들이 능글맞게 웃으며 계속 비디오를 보자고 말했을 때 얼굴은 붉어지고 손은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신참 교사와 학생들이 대형 모니터로 상의를 벗은 여자들을 보다니!

그 날을 돌아보면 피식 웃음이 난다. 이 사건에 대해 그 이후에 이야기하고 다닌 적은 별로 없다. 부끄럽기도 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며 비슷한 에피소드를 접하고 나니 이런 실수를 나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오히려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었다. 내가 다른 분의 글을 읽고 나만 이런 실수를 하는 건 아니라고 위로를 받았듯이, 이 에피소드를 접하고 위로를 받을 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부끄럽지 않게 느껴진다.

비단 신규시절에만 이런 실수를 하는 건 아니다. 나 또한 그 이후에도 정말 많은 실수를 했다. 교직이 어려운 것은 매일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과의 일상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1년차에 있었던 실수가 10년차 20년차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20년 동안 없었던 실수가 30년차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별 일 아닌 것도 큰 일이 될 수도 있고, 큰 일도 별 일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당시에는 정말 심각하게 여겨졌던 상황들도 돌아보면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성공이든 실패든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내 것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충만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충만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글을 쓰면서 감히 그런 용기를, 내 인생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를 내어볼 수 있는 것 같다. 신규 시절이나 경력이 쌓인 후에라도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실수를 통해 현재의 내가 있다.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오히려 실수를 통해 조금 더 현명해지도록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내일의 나는 분명 더 현명해져 있을 것이라 믿는다.

-<긍정의 힘으로 교직을 디자인하다>(2019.2.20.) 중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3. 첫 수업, 그리고 신참내기의 고군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