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간부자 Aug 10. 2022

산책은 나의 아로나민골드

일상 만족(1) 산책

산책을 하면 기운이 솟는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쓰려고 마음먹고, 원래는 제목을 '산책은 나의 비타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비타민 한통을 다 먹어본 적이 없어서 비타민의 효과를 잘 모른다. 검찰에 근무하던 시절 가장 존경부장님이 고려은단 비타민C, 초정리 탄산수, 옥반식품 양파즙 예찬론자는데, 특히 비타민C는 셔츠 윗주머니에 항상 넣어다니며 주위 사람에게 자주 권해주시고 그 효능을 설파하실 정도였다. 부장님을 존경하던 나는 부모님께 옥반식품 양파즙을 주문해드리고, 내가 먹기 위해 고려은단 비타민C 한통을 샀지만, 한통에 너무나 많은 양이 들어 있고, 큰 알약을 잘 못삼키는 편인데다 비타민을 삼켰을 때 잠깐 올라오는 신맛도 괴로웠고, 이런 걸 감수하고 장복할만한 뾰족한 효능도 못 느끼겠다는 이런 저런 핑계로 반의 반도 다 못먹었다. 당시는 '나를 위해' 뭔가를 '꾸준히' 하는 습성이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아무리 부장님을 존경했어도 부장님이 강추하는 비타민C 장복은 나에게 무리였다. 이런 이유로 비타민에 활력증진 또는 원기회복의 효과가 있는지 체감을 못해봤기 때문에 '산책'을 '비타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글의 제목에도 내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되는 것이 좋겠다생각이 자, 살면서 횟수를 지켜서 한통을 다먹은 유일한 자양강장제인 아로나민골드가 떠올랐다. 산책이 가져다 주는 활력증진, 원기회복 효과를 아로나민골드에 빗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살면서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었던 시기가 세 번 있었다. 첫번째는 사법시험 2차를 준비하던 시기, 두번째는 사법연수원 4학기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 세번째는 초임 검사 시절이다. 사법시험 2차를 준비할 때는 세끼 밥을 다 챙겨먹어도 계속 살이 빠져서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고 피골이 상접한 상태가 되었지만 어려서였는지 체력이 달린다는 느낌은 없었고, 약을 복용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연수원 4학기 시험을 준비할 때는 기력이 달린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고(한 과목당 8시간 동안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시험시간 자체도 체력적으로 무리였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역시 힘들었다), 해야 할 공부량에 비해 체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 뭐라도 약을 챙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시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 왜 아로나민골드를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TV에 자주 나 CF 영상의 잔상이 남아서 그럴 것이다(브랜딩의 힘이). 어쨌든 당시 아로나민골드를 먹으면 '뭔가 조금 기운이 도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한통을 다 먹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약은 이러한 느낌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지가 포인트인 것 같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초임 사 시절에는 기력이나 체력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위기를 느꼈고, 여기서 버티기 위해서는 약이 아니라 운동이 필요하다는 직감에 따라 생애 처음으로 PT를 끊고 생존을 위한 근력 증진통해 가까스로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이 때 이후로는 아로나민골드와 같은 자양강장제를 먹지 않는다. 지금은 오메가3와 루테인 정도만 챙겨 먹고, 최소한의 근력 유지를 위해 주1회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그리고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느낌과 함께 무기력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고 가족이나 의뢰인에게 화가 나려고 할 때는 집밖으로 산책을 가려고 한다.


최근에 8시까지 늦잠을 잤는데도 아침에 깰 때부터 이미 피곤한 날이 있었다. 왕복 2시간의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보고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의욕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당장 처리해야 하는 급한 일 외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꿀맛 같은 육아 휴식시간(저녁 8시부터의 TV 시간)이 되었는데도 뭘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하릴 없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봤다가 인스타그램을 봤다가 뒤적거려도 아무런 재미를 못느끼겠던 그 시간에 '이래서는 안되겠다' 마음먹고 단 10분이라고 산책을 하자고 밖으로 나갔다. 집 바로 근처에 있는 공원을 걷기 시작하자, 하루종일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전환되었고, 내내 찌뿌둥했던 몸 상태도 나아졌다. 내 메모장의 1번 다짐 '지금 이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하고, 선택할 때는 내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의식하자'는 다짐이 비로소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만약 그날 산책을 안나가고 집에서 계속 뒤적거리고 있었다면, 꿀맛 같은 TV시간이 끝난 후 9시가 었는데도 요란스럽게 구는 아이들에게 온갖 짜증을 내며 좀 조용히 해라, 뛰지 마라고 폭풍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산책으로 기분이 전환되자 내 삶의 우선순위를 인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9시가 넘어도 잠잠해지지 않는 아이들과 집에서 씨름하는 대신 아이들에게도 밤산책의 즐거움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에 아이들에게 인생의 다양한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 부모의 임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걸 실천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산책 후 집에 돌아와, 밖에 잘 나가지 않으려는 집돌이 게임러버 첫째를 좋은 말로 달래서(첫째를 좋은 말로 달래는 것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 상태가 좋지 않으면 결국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강요하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공원으로 나갔다. 안나간다던 첫째는 막상 공원에 나오자 제일 신났고, 가족이 함께 속도를 맞춰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고, 벤치에 누워 밤하늘에서 별과 비행기를 찾아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산책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은 집에만 있을 때보다 쉽게 잠자리에 들었다.   


안나온다더니, 뒷모습만 봐도 신난 걸 알 수 있는 아이들


원래도 산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 날을 계기로 산책이 가져다주는 기분전환, 활력증진 효과를 확실하게 체감했고, 산책이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책에서 만난 아래 문구 덕분에 아침산책도 더욱 즐기게 되었다.


토닥토닥 숲길(박여진, 백홍기)

우리는 그늘이 드는 곳에 돗자리를 펴고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와 빵을 꺼냈다. 빵에 버터를 바르고 고다치즈를 얹었다. 무성한 향을 풍기는 뜨거운 커피와 짭짤하고 고소한 빵, 그리고 안개가 해를 타고 사라져가는 숲은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고 서로 쾌적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소나무에 가린 하늘을 보며 1시간 정도 달디 단 잠을 청했다. 여행에서의 일상은 늘 이렇다. 새벽에 도착해 아직 눈뜨기 전인 길을 만나 천천히 즐기고, 간단히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먹고, 숲 그늘에서 잠깐 낮잠을 잔다.


숲과 잠(최상희)


그곳에 있는 동안 일상은 긴 산책과 짧은 산책으로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수를 따라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책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고, 밤 사이에 조금 딱딱해진 빵을 썬다.



그동안 아침형 인간이 되리라 숱하게 마음 먹고 숱하게 실패했었다. 책이나 요가를 좋아하지만, 알람소리에 일어날까 더 잘까 고민할 때 '일어나서 책 읽자' 또는 '일어나서 요가하자'는 마음은 나를 잘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일어나서 산책나가자'라고 생각하면, 감기는 눈을 번쩍 뜰 수 있다. 요즘의 아침산책 루틴은 이렇다. 전날 밤에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두고,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간다. 그 날의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며 실컷 걷는다. 걸을 때는 그 날 해야 할 업무가 생각나기도 하고, 가족이나 지인 등 특정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며, 뉴스에서 본 사건사고에 대해 생각하거나 좋은 여행지나 취미생활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쫓아내지 않고,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리라 마음먹지도 않고, 모든 생각들이 그냥 흘러가게 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금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가 된다. 그렇게 여유롭게 걸음을 계속 옮기며 산책을 하다가, 마무리 코스로 근처 빵집에서 담백하고 말랑말랑한 빵을 사온다. 집에 들어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갓 사온 빵에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아침으로 먹고, 소의 일상을 시작한다. 일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갖는 이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 요즘은 거의 매일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나간다. 여름휴가를 가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했고, 덕분에 멋진 해안산책로를 발견해서 여행과 산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몇번이나 갔던 해운대였는데, 이번 아침산책에 처음 발견한 멋진 산책로

 

무기력할 때, 마음이 좀 이상할 때, 왠지 몸이 찌뿌둥할 때 짧은 시간이라도 일단 밖으로 나가 걸어보자. 꼭 공원이 아니더라도 동네 골목이어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보자. 별다른 목적 없이 마치 여행 온 것처럼 그냥 걷다 보면, 기분이 전환되고, 찌뿌둥한 몸이 풀리며, 몸과 마음이 훨씬 개운해진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흘려보내다 보면 지금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장 위로 떠오르며 의욕이 생긴다. 그래서 산책을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좋아진 상태로 산책을 마칠 수 있게 된다. 이는 또 언젠가 무기력한 하루를 맞이할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다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비움과 나눔이 어려운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