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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l 31. 2022

비움과 나눔이 어려운 이유

인간의 타고난 성향에 반하는 것일지도

둘째 유치원에서 아나바다 시장놀이를 한다는 공지가 왔다.

사용하지 않지만 남에게 줄 수 있는 멀쩡한 장난감을 가져오라고 한다. 나이스!


안그래도 둘째방에 장난감과 인형이 쌓이고 있어서 필요없는 것을 정리하기 위해 "더 이상 안쓰는 물건은 다른 동생에게 주자"라고 몇번 꼬드겼는데, 자기방에 있는 장난감들은 "다 갖고 노는 것"이어서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둘째였다. 다 갖고 놀기는.. 몇달째 손도 안 댄 것들이 수두룩한데.

첫째방에서 가까스로 추려낸(첫째도 나눔을 완강히 거부해서 그나마 다른 동생에게 보내주겠다고 딱 한 개 허락해준) 포크인 자동차 장난감을 보더니, 다른 동생에게 줄 수 없다며 자기가 갖고 놀겠다며 자기방으로 가져간 둘째였다. 그리고 그 포크레인은 둘째방 서랍에 들어가 달간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번 아나바다 시장놀이에 제출할 장난감 후보 1순위는 바로 그 포크레인이었다. 2순위는 노래하며 바닥을 돌아다니는 아기상어 장난감, 3순위는 한글을 배우기 위한 핑크퐁 장난감. 한글은 진작 깨쳤고, 아기상어나 핑크퐁은 3~4살 애들이 좋아하는 것이니 내 기준으로는 6살 둘째에게 필요가 없고, 이제 잘 손도 안가 것들이다.


둘째에게 아기상어는 한동안 안갖고 놀지 않았냐고 말하니 "아기상어는 나중에 에어바이킹(실내에서 타는 에어바운스의 일종) 탈 때 갖고 놀려고 아.껴.둔.것"이라고 했다. 그래 아껴둔 거구나... 그럼 "이제 한글을 아주 잘 아니까 핑크퐁 한글은 이제 필요 없지 않을까"라고 했더니 아침 식탁에 핑크퐁 한글 버스를 가지고 와 아침 내내 한글 퀴즈를 맞추며 즐겁게 노는 모습으로 나눔을 거부했다.


결국 한번도 제대로 가지고 논 적 없는(애초에 첫째의 것이고 둘째의 취향과 거리가 먼) 포크레인을 나누기로 극적 타협을 보았다. 딱 한개의 장난감을 내보내는 것도 이리 힘들어서야.. 둘째방의 장난감과 인형 더미를 어찌 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비움과 나눔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비움(어떤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하고 내보내는 것)이 '자신이 과거에 한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물건을 비운다는 것은, 그 물건을 사느라 돈을 쓰고, 물건을 관리하느라 공간 에너지를 썼던 그간의 내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어서 심리적으로 강한 저항드는 것이라추측했다. 그래서 물건을 비운다는 선택지를 앞에 두고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언젠가 쓸 일이 있을거야" "다른 용도로 쓰면 활용 가능하지 않을까" 등의 쓸모를 자꾸 들이대며 자신의 지난 선택을 합리화하려는 것 아닐까 생각했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배우자와의 이혼을 망설이는 이유, 잘못 들어간 주식을 손절하지 못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비움과 나눔을 완강히 거부하는 둘째를 보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과는 무관하게, 그냥 비움과 나눔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여담으로, 포크레인을 아나바다 시장에 내놓기로 결정하고도 이를 받어들이지 못하고 엉엉 울며 자기는 아나바다 시장에서 다시 포크레인을 사올 거라고 선포했던 둘째는 막상 아나바다 시장이 열리자 포크레인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분홍색 발레옷을 입은 토끼인형을 데려왔다. (분홍색, 발레, 토끼 모두 둘째의 취향저격템이다..)

필요 없는 것들을 비워내야,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내게 어울리는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 둘째도 이 경험으로 조금은 알게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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