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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Dec 25. 2022

죽 같은 죽을 만드는 즐거움

일상 만족(3) 요리 - 중요한 것은 간, 그리고 충분한 시간

어려서부터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요리라고 부를 만한 나의 첫 요리는 피망참치전이었다.

슬라이스한 피망 안에 참치소를 채워 계란물을 입혀 전을 만드는 것인데, 열살 전후의 나이에 이걸 만들었었다.

인터넷으로는 '더블피의 뚝딱쿠킹'이라는 요리웹툰을,

책으로는 문성실님의 요리책을 주로 참고했었다.


좋아하는 것과 실력은 별개다.

아주 맛있게 만들어서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요리가 있고(닭간장구이),

아주 맛없게 만들어서 지금까지 형제들이 진저리치는 요리들이 있다(브로콜리 크림스프, 스파게티).

셋째동생은 내가 만든 스파게티가 본인 인생 최초의 스파게티였는데, 너무 맛이 없어서 '스파게티란 것이 이렇게 맛이 없는 음식이구나' 오해한 나머지 스파게티를 몇년이나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오해가 풀려 다행이다.

브로콜리 크림스프는 너무 너무 느끼해서 나조차도 몇숟갈 먹을 수 없었고, 그 뒤로 스프는 철저하게 사먹고 있다.


이런 내가 요리해보고 싶다는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는 몇가지 음식이 있다. 양배추 피클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과 직접 우린 육수로 요리하는 것이다. 프로 주부가 되면, 주말마다 육수를 내서 유리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주중에 각종 요리에 이 육수를 활용하겠다는 로망이 있었다.

엄청나게 장황한 요리는 아니지만 왠지 프로 주부의 포스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다는 마음의 장벽 때문에 시도를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직접 육수를 내서 잔치국수에 도전했다가 대실패를 한 적이 있어서(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육수 내기는 더욱 높고 먼 곳으로 가버렸다.


평범한 요리범재인 나와 달리 우리 엄마는 요리천재다. 자고로 천재는 왜 그것을 잘하는지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냥 하니까 되는 사람이라 그렇다. (천재들에 주로 하는 말 : 그렇게 어렵지 않아. 어렵게 생각하지마. 그게 왜 안되지?)

요리천재 엄마한테 잔치국수 실패담을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요리는 간만 맞으면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처음에는 그 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를 몰랐는데,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 위주로 꾸준히 공부했어요 라고 비결을 털어놓는 거랑 비슷한 정도의 하나마나한 말이라 생각했다) 이후 요리를 할 때마다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어찌되었건 간만 맞으면 먹을 순 있다'는 생각으로 간 맞추기에 가장 중점을 두었더니, 예전처럼 대실패하는 경우는 없어졌다. 역시 기본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요리경험이 쌓이면서 국물이 있는 요리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재료에서 맛이 우러날 시간이 필요하고, 맛이 우러난 국물이 다시 재료에 스며들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맛이 깊어진다. 그리고 간을 맞추면 된다. 아마 예전에 내가 끓인 잔치국수 육수는 맛이 우러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고, 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뜨거운 물 소면'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과 깨달음이 쌓이고, 이제는 애들도 좀 커서 주말에 차분히 요리할 시간적 여유도 생겨서, 드디어 직접 육수를 내서 죽을 끓이는 것을 시도했다. 죽은 예전에 한번 망한 적 있는 메뉴다. 엄마가 많이 아파서 밥을 못 먹길래 처음으로 죽을 만들어봤는데 너무 너무 느끼했고 죽 같지도 않은 질감이라 그냥 밥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은 결과물이었다. 그 이후로 죽은 10년 이상 시도할 생각도 안하고 맛있게 사먹어 왔다.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메뉴 샤브샤브의 마무리로 셀프 죽만들기를 몇번 해봤던 것에 용기를 얻어 다시 도전해보았다.


육수가 진한 색깔로 잘 우러났다.

엄마가 준 좋은 육수재료 세 가지(멸치, 새우, 버섯)를 넣고 가스불을 올리고, 죽 밑재료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 충분히 끓였더니 육수가 아주 맛있게 잘 우러났다. 그리고 유튜브로 죽 끓이는 방법을 검색하니, '밥이 풀어질 정도로 충분히 끓이라'라고 하길래, 죽 질감이 될 때까지 육수를 계속 부으며 약한 불로 계속 끓였다. 그래서 오늘 우린 육수 한 냄비를 몽땅 죽에 다 썼다.

그 결과 오늘은 드디어 '죽 같은 죽'을 만들었다.

약간 심심하긴 했지만, 반찬을 곁들이니 간이 딱 맞았다.


사진 좀 열심히 잘 찍어야 하는데..

마음의 여유를 갖고 만들고 싶은 음식을 요리하는 데 충분히 시간을 쓰는 것은 참 즐겁다. 직접 요리를 하다보면, 일상이 좀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어 좋다. 삶의 중요한 부분인 끼니를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족'의 만족감도 좋다.

내년 2023년에는 양배추 피클도 꼭 도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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