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 변호사에게 돈은 곧 시간이다.
개업 변호사가 돈을 번다 = 사건을 수임한다 = 수임한 사건 업무를 수행하는 데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많이 벌수록 많은 시간을 업무에 투입해야 한다.
일부 정직하지 않은 부류는 수임은 열심히 하고, 수행은 내팽개쳐서 돈도 많이 벌고 시간도 많이 확보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깜냥이 못된다. 받은 만큼 일해야 부채감에 쫓기지 않고 마음이 괴롭지 않다.
회사에 소속된 변호사 친구들이 개업 변호사의 장점을 물어올 때면 나는 "시간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둘 중 하나는 있다. 시간도 없으면서 돈도 못 벌지는 않는다"라고 답한다. 개업 변호사가 돈을 벌지 않는다(벌지 못한다) = 사건을 수임하지 않는다(못한다) = 업무에 시간을 덜 투입한다 = 한가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을 못 벌 때는 대신 시간이라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구들은 '돈을 못 벌고 시간이 엄청 많은 상황'을 두려워하며 개업을 주저한다.
개업변호사를 하면서 나는 돈과 시간의 상호대가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운이 좋게도 나는 동업자가 있고, 맞벌이인 남편이 육아휴직을 끝내고 곧 복직하기 때문에 돈보다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회사에 가장 열정을 보이는 동업자들 일부에게 회사 지분 중 절반을 양도하기로 했다. 내가 지분을 양도한 동업자들은 당장의 시간보다는 당장의 수익과 회사의 성장에 가중치를 두는 열정 만수르들이다. 나는 지분을 양도하면서 스스로 급여를 깎았고, 회사 경영을 전담하는 열정 만수르 동업자들과 나의 기본급은 약 3배 가량 차이가 나게 되었다. 이로써 나는 동업자들에게 부채감 없이 회사를 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주 1일은 완전히 쉬고, 회사에 가는 날에도 조금 늦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할 것이다. 사건도 덜 수임할 작정이다. 그래도 동업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 기본급 및 배당 구조가 되었다.
남편은 농담처럼 "딱 1년만 더 바짝 일해서 BMW X7으로 차를 바꾼 후에 아예 육아휴직을 해서 제대로 쉬는 것이 어떠냐"며 장난기 어린 진담을 건네며 내가 돈보다 시간을 선택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내 결단력을 잘 아니까 내 결정을 뒤집으려 하지는 않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X7을 갖고 싶은 사람이 돈을 더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 남편은 갖고 싶은 게 많지만, 정작 자신의 여가시간은 오롯이 즐거움에 투자하고 있고, 회사에서 정해진 시간을 근무하는 것 외에 추가적인 소득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더 쏟진 않는다.
나는 별로 갖고 싶은 것도 없는데 지난날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돈 버는 데(일하는 데) 쏟아 왔고 적당히 많이 벌어 집 대출을 갚았고 차도 샀다. 만약 올해도 열심히 일을 해서 적당히 돈을 벌었다면,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년쯤 남편이 원하는 차로 바꿔줬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순간순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이 맞는지' 의심하면서 슬퍼하다가, 당장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애써 힘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아니다.
2023년에는 돈보다 시간을 우위에 두는 생활을 전면적으로 실행해보려고 한다. 만다르트 계획표 형식으로 '시간부자가 되기' 세부계획도 세웠다. 며칠에 걸쳐 계획표를 적으면서 깨달았는데, 나는 사십이 다되도록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시간을 들여 잘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수는 있는데, 딱히 깊게 생각해본 적 조차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대체 그 동안 어떤 기준으로 진로를 정하고, 이직을 해온 것인가) 그래서 올해는 '잘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들이자'를 목표로 세웠다. 처음에는 '시간을 들여 잘하고 싶은 일'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을 계속 이 생각만 했더니, 드디어 잠재되어 있던 나의 욕망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는 정리전문가가 되어 정리컨설팅을 하고 싶다.
웹툰 작화법을 배워 생활툰을 그려보고 싶다.
계절마다 가는 당일치기 트레킹 여행을 상품화해서 신규 참가자를 모집하고 싶다.
재무상담가가 되어 적정 지출에 대해 컨설팅을 하고 싶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는 바를 기록하고 싶다.
다 내가 평소에 관심 있는 분야지만, 아직 스스로도 잘하지 못하는 분야이다. 지금은 전혀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에는 힘이 있어, 어렵게 입밖으로 내뱉고 나면 뭔가는 결국 이뤄진다고 들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 본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당장 뭔가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잘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쓰자. 동업자, 의뢰인, 남편, 가족 등 그 누구에게도 부채감을 느끼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