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간부자 Jan 13. 2023

'해야 한다'에서 '하고 싶다'로

나는 사남매의 장녀로 자랐다. 밥을 굶을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올라와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이 없었던 부모님이었고, 서울에서의 첫 집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 단칸방이니 가난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게다가 형제 많았으니 빠듯한 집안 형편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말귀가 밝았다.

어른들 대화를 귀동냥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훤히 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님 그냥 타고난 기질인지, 어려서부터 내가 속한 집단의 규칙을 잘 수용하였고, 나에게 주어진(요구되는) 역할을 완수하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집에서는 동생들을 돌고,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나 밥 차려먹는 정도의 간단한 집안일을 수시로 했다. 그러다가 가끔은 반항을 해서 엄마한테 맞기도 했고, 친구랑 단둘이 놀기 위해 동생들을 놔두고 도망치는 일탈도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집중해서 듣고, 선생님 말에 호응하고,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학생에게 요구되는 모든 활동을 성실하게 했다. 그러다 방학 때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기도 했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했고, 야자 때 도망쳐서 노래방을 가거나 밤을 새워 판타지 소설을 읽는 소소한 일탈도 했다.


법대로 진학한 이후에는 초에 사법시험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법대에 간 것이기도 했고, 주변 친구들도 거의 다 시험을 준비했기에 진로에 대한 고민은 1도 없이 사법시험 준비를 했다. 기들이 시험공부를 시작하는  공부를 시작, 동기들이 신림동 고시촌에 갈 때 함께 신림동에 갔고, 왕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거 딴짓 안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너무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시기에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게 사법연수원에 가게 되었고, 연수원 성적대로 진로가 결정된다는 걸 거기 가서 알았다. 여자연수생의 경우 성적이 좋지 않으면 남자연수생에 비해 취업이 힘들다는 것도 거기 가서 알았다. 법연수생들은 너무나 성실한 사람들이고, 내가 속했던 그 어떤 집단보다 엄청 열심히 하는 분위기였다. 나라고 뾰족한 다른 수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덩달아 함께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히 좋은 성적을 받았고, 검사로 임관할 수 있었다.


신임검사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미제 사건 처리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업무에 투입고, 윗사람을 극진히 모시며 조직문화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간 살아왔던 대로 나는 조직의 규수용했고, 최대한 맞추려 노력했다. 첫 2년 동안은 하루도 정시에 퇴근하는 날이 없었고, 매일 야근을 하거나 회식에 갔다.  나가고 싶다는 열망은 없었기에 적극적으로 상사에게 아첨하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조직의 규범에 따라 선배들이 부르는 자리를 거절하지 않고 나갔고, 적당히 대화에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맞추곤 했다. 그러던 느날 너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안좋아 하던 일을 접고 밤 9시쯤 집에 들어갔더니 동생들이 현관까지 뛰어나오며 "언니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라고 나를 반겼을 때 현타가 왔던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이 선명하다(밤 9시인데 빨리라니..). 그렇게 소속 집단에 순응하다가도 도저히 아닌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가차 없이 결단을 내리고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 내 특징이다. 4년차에 다행히도(!) 엄청나게 싫은 부장님을 만나 퇴사 하게 되었다. 그 부장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검찰을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고,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회사에 쏟으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한때 너무 너무 싫었던 그 부장님을 지금은 인생의 귀인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검찰을 그만두고 대형로펌에 갔다. 연수원 시절부터 대형로펌에 대한 공포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잠을 자지 못하도록 무섭게 일을 시킨다는 편견이었다) 로펌 취업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로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직할 곳이 미정인 상태에서 퇴사를 하겠다고 하면 놓아줄 것 같지 않아서(예상은 적중했다. 퇴사를 만류하는 수많은 사람과 많은 면담을 했다) 일단 이직할 곳을 먼저 정해야 했고, 마침 그 로펌에서 경력자를 뽑는다고 해서 운때가 맞아 가게 된 곳이었다. 막상 로펌에 가보니 로펌의 업무량이 많긴 많았지만 검찰만큼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회식이 없었다. 내가 맡은 일만 제대로 하면 되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기한 내에 제대로 하기만 하면, 야근을 하든 칼퇴를 하든, 주말에 회사를 나오든 안 나오든 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을 함께 먹자고 수시로 불러내는 사람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역할(=일을 제대로 잘한다)에 충실했다. 사실 로펌에 입사하자마자 갑자기 임신이 되어서, 약간은 눈치가 보였다(아무도 드러내놓고 눈치를 주지는 않았다). 한 사람 몫을 제대로 잘해서 스스로 떳떳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로펌에 지원하게 될 여자후배들에게 장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임산부인 나의 업무 부족으로 인해 그 로펌에서 '가임기 여자 변호사는 되도록 뽑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다행히 입덧도 없는 편이어서 한 사람 몫의 업무량은 뜬히 다 했다. 임산부의 몸으로 지방 출장도 여러번 갔고, 밤샘 입회도 많이 했고, 서면 작성 기한도 칼같이 지켰다.

알랭 드 보통의 이 문장에 기대서, 힘든 업무에 대해 어떻게든 힘을 내보려 애썼던 시기를 지나왔다.


이렇게 나의 지난날은 어린 학생 때부터 직장인 시절까지 모두 '해야 한다'로 가득했고, '하고 싶다'가 선택의 기준인 적은 없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한 선택'이었는데도 그랬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선택을 직접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기대를 했을 뿐이다. 나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야 한다'의 영역에서 실패를 한 적이 없었다. 육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육아는 정말로 온갖 '해야 한다'는 의무가 넘치는 영역이다. 임산부 시절부터 신생아, 영유아 시기까지 진짜 해야 할 것이 끝이 없었다. 특히, 신생아 시절에는 아기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단계부터 이미 녹다운이 되었다. 그래도 아이를 굶길 수는 없으니까, 시간 맞춰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잠을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키는 기본적인 것들은 해야 했고, 해야 하는 일이니힘을 짜내 할 수 있었다. 아이의 기본 의식주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나의 의식주는 허물어졌다.


그런데 엄마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그 이상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씻지 않는' 공백의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데, 그 때 아이 발달을 위해 아이에게 말을 걸고 아이와 상호작용을 하고 놀아주라고 했다. 아직 내 말에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어리디 어린 아기에게 말을 걸면서 상호작용을 계속 시도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 밖에도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거나 자기주도 이유식을 시도하며 오감과 주도력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등의 각종 수준 높은 요구와 기대가 만발한 육아의 영역에서 나는 처음으로 '해야 한다'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겠다며 두손 두발을 들었고, 큰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출산휴가를 다 쓰지 않고 회사로 도망쳤다.


나와 달리 남편은 '해야 한다'의 영역에서는 매우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지만, '하고 싶다'의 영역에서는 아주 강한 사람이다. 남편은 회사가 가깝고 출근 시간이 늦은 편이라, 내가 회사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8시 30분이 남편의 기상 시간이었는데, 그 늦은 시간에도 아침마다 늘 힘겨워하며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회사에 갈 때면 그렇게 힘겹게 일어나던 사람이 연차를 고 조조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면 (보고 싶은  영화를 아이맥스로 보려면 집에서 엄청 먼 영화관에서 조조로 볼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새벽부터 벌떡 일어났고, 내가 회사에 가기 위해 일어났을 때 이미 나가고 없었다. 나는 해야 하는 일 때문이면 밤을 새워 일하기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쉬는 날이면 늦잠으로 오전시간을 날리곤 했는데.. 회사가는 날은 못 일어나지만 연차인 날에는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남편을 보며 '한 번 사는 인생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나도 연차를 쓸 때면 최대한 하루를 꽉채워 좋아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일년 전까지평일에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주말에만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남편은 주말 아침에도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했다. 아침에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은 당연히 기대하기 어려웠고, 둘째 분유 좀 먹이라고 하면 분유를 먹이며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천불이 나곤 했다. 아이들과 일주일 내내 함께 지내게 된 지금도 여전히 남편은 아침 시간에 맥을 못춘다. 그런 남편이 동네 조기축구팀을 시작했는데, 주말 아침 7시에 시작되는 경기에 참석하기 위해 6시 반이면 벌떡 일어나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축구를 하러 나간다. 지각하는 법도 없다. 이처럼 '하고 싶다'의 영역에만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는 남편 때문에 서운하고 못마땅한 적도 많았지만, 적어도 남편은 내게 '해야 한다'의 기준을 강요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도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주의다. 연수원 시절 꽤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남자들에게 끝내 적극적으로 마음이 가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연수원 그들은 나와 같은 부류, 해야 한다는 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들이어서 그들과 사귀는 상상을 하면 숨이 막혔다. 그래서 만날 때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드는 남자친구(남편)와의 교제를 끊을 수 없었다. 숨통이 트이는 대신 가끔 천불이 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남편의 조기축구 사진. 올해는 간부까지 맡아 경기하지 않는 시간에도 축구팀 생각에 빠져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바꿔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한다. 살면서 처음으로 '하고 싶다'를 기준으로 삼으려 마음먹으니,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머리가 막 어지럽고 덩달아 몸까지 좀 아프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가라앉았다가 널을 뛴다. 그 와중에도 아직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어서 넋 놓고 있다가 실수할 뻔 하기도 한다. 적응기간이라 생각다. 마음 가는대로 살아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는 브런치 어느 작가님의 말에 기대서 또 힘과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 급여를 깎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